[매경춘추] 암기

2024. 1. 23. 17:39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시대에도 에두바(Eduba)로 불린 학교가 있었고, 그 상황에 관한 글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애당초 공부라고 하면 늘 함께 따라붙는 암기가 요즘처럼 가치 절하된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면서 상대적으로 암기가 주입식 교육과 혼동되어 불필요하거나 열등한 공부로 간주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시대에도 에두바(Eduba)로 불린 학교가 있었고, 그 상황에 관한 글들이 남아 있다. 그 문서들에는 학부모가 선생에게 촌지를 전달하거나 학습이 부진한 학생들에 대한 체벌, 그리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에 관한 이야기 등이 있다. 4000~5000년 전에도 인간 사는 모습은 비슷했던 것이다. 쉽게 추측하겠지만 암기는 에두바에서도 학습의 주요 부분이었다. 그런데 애당초 공부라고 하면 늘 함께 따라붙는 암기가 요즘처럼 가치 절하된 때가 없는 것 같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교육도 큰 변화에 적응해야 할 뿐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낼 선진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면서 창의, 비판, 소통, 논증 등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강조되었다. 열거한 항목들은 정말 중요하다. 내가 속한 대학과 연구소도 이에 전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면서 상대적으로 암기가 주입식 교육과 혼동되어 불필요하거나 열등한 공부로 간주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암기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고 쓰고 생각할 때, 일상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 들은 것, 그리고 더 깊게는 외운 것으로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데 왜 굳이 외워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우리 뇌는 단순한 저장장치가 아니다. 가령 시를 100편 외운 사람의 문장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것과 다를 텐데, 이때 둘 간의 차이는 단지 문장력의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삶의 격이 달라진다.

외운다는 것은 학습(學習)의 '습'에 해당하며 그것은 흔히 말하는 '피와 살'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배운 것은 잊혀도 외워 '습'한 것은 내 일부가 된다. 기민하게 생존과 번영의 전략적 사고가 돌아가지 않는 한 높은 문장을 습한 사람은 그 문장의 결대로 삶을 형성하려 한다. 위대한 문장이 습득된 사람은 의미와 품격과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삶을 형성하려고 애쓰고, 이때 암기하여 체화한 높은 사상의 도움을 받는다.

암기에 관해 쓰면서 존경스러운 한 친구를 기억한다. 요새 자식들을 이른바 '학원 뺑뺑이'를 돌게 할 때, 그는 자식들에게 시(詩)를 외우게 하였다. 내 자식을 다 대학에 보낸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참 부끄러웠다. 나는 자식들에게 시를 외우라고 권해본 적조차 없는 듯했다.

암기한 시들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소리 내어 외워보았다. 오늘은 현택훈 시인의 '여행길'이라는 시를 외운다. "…손가락으로 창문을 여닫는 관악기의 이름은/ 처마 아래 볼 빨간 아이가 호호 불면 분홍색 바람 꽃잎 골목길 가득 흩날리는 악기/ 짧게는 피리… 사라진 별의 반짝임을 쓰는 마음의 이름은/ 아잔타 석굴의 먼지벌레가 두고 온 공간에게 쓰는 편지/ 짧게는 시." 이 시를 외우며 한 단어, 한 사물에 얽힌 사연을 추적하는 훈련을 하면, 우리의 삶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