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사양산업이라고?···친환경 물결에 책장 넘기는 중" [이사람]
☞영원한 제지맨
대학시절 종이 매력에 푹···加 유학까지
제지 연구 올인···특수지 대중화 이끌어
'골판지 집중' 태림을 업계 빅2로 키워
☞ 제2의 부흥기 개척
국내 종이 재활용률 85%에 생분해 가능
조림 통해 생산···자연훼손은 잘못된 인식
아마존 등 제지 포장재···글로벌 트렌드로
스티로폼 대체 친환경 솔루션 앞장설것
대한민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 130여 개의 제지·펄프 기업들이 성행했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신문 용지 제조사가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제지 강국’이었다. 산림자원 부족 속에서도 뛰어난 기술과 품질 덕에 제지는 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로 꼽혔다.
이 같은 제지의 위상은 정보기술(IT)의 등장과 득세 탓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요가 감소하면서 관련 기업 수가 현재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기업들도 수익성 둔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 다수의 대학에 존재했던 제지학과 역시 이제는 국내에 단 한 곳만 존재한다. 제지 산업이 대표적인 사양산업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종이 산업의 몰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종이 산업의 부활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있다. 40년간 ‘종이’라는 한 우물만 판 ‘영원한 제지맨’ 이복진(사진) 한국제지연합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23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국제지연합회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종이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2000여 년의 가치가 담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며 종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먼저 ‘제지 산업은 사양산업’이라는 말에 그는 “어느 산업이나 부흥기나 침체기가 있다”면서 “사양 기업은 있을 수 있지만 사양산업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제지가 소재로서 앞으로 더 다양하게 개척된다면 다시 부흥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과 종이와의 만남은 1976년 시작됐다. 어린 시절부터 종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해 서울대 임산가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종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같은 대학에서 제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캐나다로 유학까지 다녀왔다. 이후 1984년 한국제지에 입사하면서 제지 업계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당시 국내 제지 산업은 급성장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부흥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솔제지 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뒤 2004년 국일제지 중국법인에서 10년 이상을 장자강유한공사 총경리(CEO)로 보냈다. 그는 “제지 산업 부흥기에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해외 투자 회사인 국일제지 장자강유한공사를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특수지 회사로 성장시켰다”며 “당시 직원들과 열을 받으면 반응하는 감열지를 비롯해 다양한 특수지를 개발했고 개발 제품들이 현재 대중화된 것을 보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제지 산업은 수출 위주 산업이었는데 해외로 진출한 경우는 장자강유한공사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은 최근 불황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한국제지 대표를 역임한 그는 2020년 태림 대표를 맡았다. 태림은 코로나 사태 이후 수요가 높아진 골판지 인기에 내실을 다졌고 최근 전주페이퍼를 인수하며 한솔과 함께 제지 업계 2강으로 떠오르며 주목받고 있는 기업이다.
40년간 제지 산업의 부흥기와 침체기를 경험해 본 이 회장은 지난해 한국제지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됐다. 현재 그는 제지 산업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제지 산업의 ‘제2의 부흥기’를 위해 그가 찾은 키워드는 ‘친환경’이다. 이 회장은 “친환경은 재활용이 가능하고 완전히 생분해돼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국내 종이 재활용률은 85%에 달하고 생분해가 가능한 종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종이의 이러한 친환경적 요소에도 오히려 종이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종이 산업의 성장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해 제지연합회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종이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86.5%는 ‘종이가 아마존 등 원시림 나무로 생산된다’고 답했다. 또 74.6%는 제지·펄프 업체들이 조성하는 조림지에 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하는 등 종이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종이 1톤을 만들기 위해 수십 그루의 나무를 베어야 하고 또 그 나무가 자라기 위해 수십 년이 필요하다는 비유가 친환경 단체는 물론 정부 홍보 자료에도 아직까지 나올 정도”라며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것이 제지연합회의 가장 큰 업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종이를 만들기 위해 자연적으로 조성된 천연림에서 무분별하게 벌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해진 조림지에서 키운 나무만 사용한다”며 “오히려 조림을 통해 나무를 순차적으로 심고 베어내기를 반복하는 순환 경작 과정에서 매년 베는 것보다 더 많은 나무를 심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나무는 일정 기간 자라 성목이 되면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성목이 되면 베어내고 새로 심는 것이 온실가스 흡수량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펄프에서 종이로 만드는 과정에서 환경에 해로운 약품을 사용한다거나 온실가스가 많이 발생한다는 점도 종이에 대한 오명이라고 전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표백 과정에서 사용하는 약제는 유해 물질이 거의 없는 환경에 무해한 제품을 사용한다”며 “온실가스 배출량도 에너지 절감, 저탄소 제품 개발 등으로 탄소배출권 거래 이후 10% 이상 줄였고 고효율 설비 도입, 연료 전환 등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내 기업도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맞춰 지속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종이의 친환경성을 입증하는 것이 제지 산업 부흥에 꼭 필요한 요소로 내다봤다. 이 회장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품 배송을 위해 종이 포장재만을 사용하는 포장 솔루션을 단계적으로 도입했다”며 “일반 종이보다 더 잘 늘어나면서 내후성이 뛰어나고 열처리로 밀봉할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한 것은 물론 제품 크기에 맞도록 포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도 개발했다”고 말했다. 포장재 사용을 최소화해 자원 낭비를 줄이고 분리수거와 재활용이 쉬운 종이를 최종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은 “최근 태림도 스티로폼을 대체하기 위해 골판지만을 이용한 ‘고성능 친환경 보냉 상자’를 업계 최초로 개발했다”며 “친환경 소재가 아니면 지속 성장하기 어렵다는 각오로 지속 가능한 친환경 포장 솔루션을 개발·제공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종이가 오랜 기간 인류의 곁을 지켜왔다. 앞으로도 친환경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종이는 다시 한 번 부흥기를 맞을 것”이라며 “나 또한 40년 넘게 제지 관련 일을 하면서 종이가 좋아지게 됐고 여전히 종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He is●···
△1957년생 △1980년 서울대 임산가공학과 △1991년 서울대 농학박사(제지전공) △1992년 캐나다 펄프제지 연구소 박사 후 과정 △1984~2000년 한국제지 기술개발부장·생산부장 등 역임 △2000~2003년 한솔제지 연구소 소장 △2004~2019년 중국 국일제지 유한공사 총경리 등 역임 △2014~2019년 한국제지 대표 △2020년~ 태림 대표 △2023년~ 한국제지연합회 회장
노현섭 기자 hit8129@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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