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옳다’ 확증편향 만연한 세상에 대한 칸의 경고 [엄형준의 씬세계]

엄형준 2024. 1. 23. 14: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황금종려상 ‘추락의 해부’…‘관계의 추락’ 통해 진실 의심하게 해
피리부는 사나이서 영감 ‘클럽 제로’… 잘못된 믿음의 위험 조명

어떤 게 진실인지 의심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통통 작은 공 하나가 계단을 굴러 내려오고, 여자를 바라보던 개가 그 공을 입에 문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암시를 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다녀왔던 다니엘은 집 밖에 피를 흘린 채 숨져 있는 아빠를 발견한다.
프랑스 산골 외딴집에 가족과 사는 유명 작가 ‘산드라’(잔드라 휠러). 남편이 튼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인터뷰가 중단되고,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은 안내견 스눕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돌아온 후 흰 눈 바닥에 붉은 피를 흘린 채 숨진 아빠를 발견한다. 경찰 조사 결과 남자는 집의 위층에서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고, 목격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건 당시 집에 있었던 산드라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떠오른다.

이런 영화에서 관객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흐름은 의외의 반전과 사건의 명쾌한 해결이다. ‘추락의 해부’는 절반쯤 이런 흐름을 따라가는 듯하지만, 추리물이나 법정 드라마에서 가질 수 있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진실을 의심하게 한다.

‘추락의 해부’는 집에서 떨어져 숨진 남자의 사망 원인을 놓고 벌어지는 법정 싸움을 그린다. 검사는 죽은 남자의 아내인 산드라의 사생활을 파헤쳐내고, 산드라라의 아들은 엄마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차이점이 영화의 감독인 쥐스틴 트리에에게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 준 비결일 것이다. 영화는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전미비평가위원회 국제장편영화상, 뉴욕비평가협회 국제장편영화상 등을 받았고,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비영어권작품상을, 크리틱스 초이스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유력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로도 떠올랐다.

초반은 제목의 문자 그대로 ‘추락’ 사건이 주제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영화는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대로 ‘관계의 추락’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들 다니엘은 몰랐던 엄마와 아빠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고 처음으로 엄마의 진심을 의심하게 된다. 법정에서 검사(앙투안 레나츠)는 물증이 없음에도 산드라의 범죄를 확신하는 듯, 약점을 찾아내 강하게 압박한다.

트리에 감독은 영화 속 검사에 대해 “악역이긴 하지만 매우 매혹적이고 사악하며 화려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며 “법정을 마치 전투장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검찰의 문명화한 폭력을 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맞서는 변호사이자 산드라의 친구인 뱅상(스완 아를로)은 “뭐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를 세운다. 뱅상은 독일인으로 남편과는 주로 영어로 대화해 온 산드라에게 법정에서 프랑스어를 쓸 것을 주문한다. 이것 역시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한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법정에 앉아 있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이다. 트리에 감독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산드라가 정말 범인인지에 대해 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관객에게 우리가 믿는 진실을 의심하도록 하고, 그러는 동안 상처받고 피폐해지는 영혼을 다룬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영화는 흥미로운 서사에도 긴 러닝타임과 자막으로 처리되는 쉴 새 없는 대사로 단박에 다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진실에 대한 궁금증과 영화 안에 숨겨진 의미는 극장 불이 켜진 후 다시금 영화를 돌이켜 보게 한다.

‘클럽 제로’에서 학생들은 영양 교사인 노백의 가르침에 따라 식사의 양을 점점 줄여가기 시작한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추락의 해부’와 함께 경쟁 부문에 오른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의 ‘클럽 제로’(24일 개봉)는 어떤 게 진실이냐를 묻는 대신, ‘잘못된 진실’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퍼져 나갈 수 있는지 경고한다.

최고급 시설에서 일대일 특별 교육을 제공하는 엘리트 학교의 새로운 영양 교사로 임명된 ‘미스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은 몇몇 뛰어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친다.

영양 교사 노백은 음식을 먹지 않는 상태에 다다르는 ‘제로 클럽’에 대한 믿음의 전파를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긴다.
처음 아이들은 식사량을 줄이면서 더 뛰어난 성과를 내고 노백에 대한 믿음은 커진다.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느끼는 고독, 지구를 지나친 소비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믿음, 부모 간섭으로부터의 해방, 성적 향상 등의 결핍과 바람을 갖고 있고 노백은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아이들의 식이요법은 점점 극단적인 형태로 치달으며 결국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노백을 제외한 교사나 부모들은 이때까지 대부분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하우스너 감독은 “미스 노백과 아이들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면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진실을 갖고 있다. 그들 모두 굶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독일의 구전동화인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이들 속에 자리 잡게 된 신념은 어느 순간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린다. 영화는 음식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런 신념은 오히려 종교에 가깝고 정치적이기도 하다.

두 작품을 포함, 국내에 개봉한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작품 중에선 이처럼 자기가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을 바꾸지 않는 ‘확증편향’에 대한 경고를 담은 영화가 유독 눈에 띈다.

현재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높은 순위를 이어 가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역시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 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을 의심하게 한다. 영화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확신이 지배하고 있는 스크린 밖 세상에 경고에 메시지를 전한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