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베일 벗은 HL그룹 후계구도

송응철 기자 2024. 1. 2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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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위가 ‘전략’, 둘째 딸이 ‘미래 먹거리’ 챙기는 구도 전망

(시사저널=송응철 기자)

베일에 가려있던 HL그룹(옛 한라그룹)의 후계구도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근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선임된 정몽원 HL그룹 회장의 첫째 사위 이윤행 HL만도 부사장이 그룹의 경영전략을 담당하고, 임원으로 승진한 차녀 정지수 HL벤처스매니지먼트 상무보가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구도를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정 회장의 장녀인 지연씨와 차녀 정 상무보는 최근 경영권 지분 매입에도 적극 나서며 승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정몽원 HL그룹 회장의 첫째 사위인 이윤행 부사장은 HL만도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선임됐고, 차녀 지수씨는 HL벤처스매니지먼트 상무보로 승진했다. ⓒ시사저널 임준선·박정훈

첫째 사위와 차녀 나란히 승진

비교적 최근까지도 HL그룹의 후계구도는 명확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부인인 홍인화 배달학원 이사장과의 슬하에 두 딸을 뒀다. 장녀인 지연씨는 일찍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미국 마운트홀리오크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대에서 석사를 마친 그는 2010년 HL만도 기획팀 대리로 입사했다. 그러나 2012년 이재성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아들인 이윤행 COO와 결혼한 이후 육아휴직 등을 거쳐 퇴사했다.

지연씨의 빈자리는 남편이 채웠다. 그가 결혼 직후부터 HL그룹 경영에 참여한 건 아니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이 COO는 2013년부터 미국 대형 로펌인 에이킨 검프(Akin Gump)와 아놀드앤포터(Arnold & Porter)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 COO가 HL그룹에 합류한 건 2017년 HL만도 경영전략 매니저로 입사하면서다. 이후 2018년 컴플라이언스 및 리스크 관리 책임매니저와 2020년 미국법인 회계·인사 담당 상무보 등을 거쳤다. 2022년에는 전무를 건너뛰고 미주 지역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향후 HL그룹에서 '사위 경영'이 이뤄지리란 추측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2012년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을 위해 사임했던 정 회장이 이 COO가 입사한 2017년 HL만도 대표이사로 복귀한 점도 사위 경영체제 안정화를 위한 행보로 해석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COO가 지난 연말 인사에서 COO에 선임되자 업계에서 '사위 경영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COO가 COO로 선임되기 직전에 정 회장의 차녀도 임원 배지를 달았다는 점이다. 정 상무보는 지난해 10월 미국 HL벤처스매니지먼트 상무보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섰다. 정 상무보는 2017년 그룹 지주사인 HL홀딩스 전략 및 기획 업무 분야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2019년 HL홀딩스와 HL만도 내 여러 부서를 거치며 실무 경험을 쌓아왔다.

현재 정 상무보가 재직 중인 HL벤처스매니지먼트는 지난해 HL만도의 주도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된 벤처캐피탈(VC)이다. 미국 내 스타트업을 발굴·지원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재계에서는 향후 이 COO와 정 상무보가 경영전략과 신수종 사업을 각각 맡아 책임지는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장·차녀, 10년여 만에 지분 매입

여기에 정 회장의 두 딸은 최근 지분 확보에도 나섰다. 지연·지수 자매는 지난해 12월5일부터 올해 1월3일까지 장내 매수를 통해 HL홀딩스 주식 5만3534주와 5만2989주를 각각 매입했다. 그 결과 지연씨의 HL홀딩스 지분율은 기존 0.01%에서 0.53%로, 정 상무보는 0.02%에서 0.54%로 높아졌다. 이들 자매가 HL홀딩스의 지분 매입에 나선 건 2014년 이후 10년여 만이다.

HL홀딩스는 HL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해 있다. HL홀딩스 경영권을 확보하면 그룹 전반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HL홀딩스는 승계 자금 창구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HL홀딩스가 내부거래를 통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HL홀딩스는 2022년 전체 매출 8923억원 중 42.81%에 해당하는 3820억원을 계열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올렸다. 2021년의 내부거래 비중도 49.31%(총매출 7104억원-내부거래액 3504억원)에 달했다.

HL홀딩스는 특히 HL D&I(옛 한라건설)와 HL클레무브, 만도브로제, HL만도 등 계열사의 물류 일감 전량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여기엔 물류창고 및 물류허브 운영, 물류 운송·포장, 물류 용역 등이 포함된다. 이 때문에 HL홀딩스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2년 공시대상기업집단 내부거래 현황 분석'에서 '물류 내부 매출 비중이 큰 기업'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지연·지수 자매의 지분 매입으로 행동주의 펀드 등 외부에 대한 방어도 한층 단단해질 전망이다. 현재 HL그룹의 지배구조는 확고하다. 정 회장이 HL홀딩스 지분 25.03%를 보유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범(汎)현대가로 분류되는 KCC도 HL홀딩스 지분 4.25%를 소유하고 있다. 정 회장이 정몽진 KCC 회장과 사촌지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호지분인 셈이다. 오너 일가 외 대주주는 VIP자산운용(9.02%)과 베어링자산운용(6.59%), 국민연금공단(5.37%) 등이 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3%룰'이다. 상법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의 회사는 '사외이사 아닌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는 '합산 3%룰'이,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는 '개별 3%룰'이 적용된다. 만일 HL홀딩스가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선임한다고 가정하면 정 회장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KCC를 포함해 6%에 불과하다. VIP자산운용과 국민연금공단, 베어링자산운용 등이 반기를 들면 표 대결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3%룰'로 타격을 입은 사례도 있다. 사조그룹이 그런 경우다. 사조산업 소액주주들은 2021년부터 주주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캐슬렉스서울과 캐슬렉스제주의 합병을 무산시키고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의 해임을 추진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특히 2022년에는 3%룰을 적극 활용해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자를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에 선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사조그룹은 계열사 간 상호 지분을 늘리는 등의 방식으로 3%룰에 대응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HL그룹 사옥 전경 ⓒHL그룹 제공

정몽원 회장 일가 의결권도 강화

HL그룹에 사조그룹의 사례는 남의 일이 아니다. 행동주의 펀드인 VIP자산운용은 HL홀딩스에 주주환원 강화를 촉구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행동을 벌이고 있다. HL홀딩스가 올해부터 3년간 총 200억원어치의 자사주를 매입 후 소각하고, 주당 최소 2000원을 배당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국민연금도 정 회장 일가에 우호적이지 않다. 국민연금은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열린 14차례의 HL홀딩스 주총에서 이사회 제안 안건에 7회의 반대 의견을 냈다. 특히 2015년과 2017년에는 정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도 반대표를 던졌다. 주주가치 훼손과 장기 연임 등이 그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연·지수 남매가 3%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 정 회장 일가는 '개별 3%룰'이 적용되는 안건에 대해 12%의 의결권을 가지게 된다. 이 경우 정 회장은 주총 등에서 좀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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