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에서 '우등생'으로…그리스는 어떻게 15년 불황을 극복했나[2024 부채리포트]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OECD 35개국의 ‘종합 성적표’를 조사해 발표했다. 2022년 4분기부터 2023년 3분기까지 근원물가상승률과 인플레이션 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고용증가율, 주식시장 성과 등 5가지 지표를 종합 평가한 결과 1위를 차지한 국가는 다름 아닌 그리스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까지 ‘국가 부실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그리스의 놀라운 반전”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 차례의 국가 부도 위기를 겪으며 ‘벼랑 끝’에 섰던 그리스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뼈를 깎는 긴축정책, 변화의 시작
2008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졌다. 순식간에 그 여파는 일파만파 퍼졌고, 수많은 나라들이 위기를 겪었다.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 2008년 금융위기는 직격탄이 됐다. 그리스를 포함한 남부 유럽 국가들의 ‘부채 폭탄’이 터지며 국가의 존립이 흔들리는 위기까지 내몰렸다. 당시 유럽 부채 위기의 진앙지가 됐던 네 국가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다. 대표적인 ‘유럽의 문제아’들인 셈이다. 그리스는 이 네 국가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국가 부도 위기를 겪은 국가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는 경제적으로 잘나가는 국가였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만 해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3.35%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스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8년 당시 국민 1인당 GDP는 3만2000달러였다.
하지만 ‘질주’하던 그리스 경제가 금융위기로 한 번에 무너지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상 의료와 소득대체율 90%에 달하는 연금제도 등 이른바 ‘포퓰리즘 정책’들이 확대되며 국가 부채가 급증한 것이다. ‘빚으로’ 운영되던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당시 그리스의 조르고스 파파콘스탄티누스 경제부 장관은 “지난 정부는 그리스의 실질 재정적자가 GDP 대비 6%라고 발표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지난 몇 주간 수정 작업을 한 결과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15%에 달한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그리스 국가 부도 사태의 시작이다. 이로 인해 무엇보다 그리스 정부는 ‘신뢰’를 잃어버리는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2011년 신용평가기관들은 그리스를 ‘정크 등급’으로 강등했다.
그리스 경제는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수십만 개의 기업들이 무너졌다. 국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국내 은행에 저축해 둔 돈을 빼내 해외에 투자했다.
이러한 흐름을 막기 위해 현금 인출과 이체를 제한하는 자본 통제가 시행됐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현금 인출기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기업들은 현금으로 급여를 주기 시작했다. 2013년 그리스 국민들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은 채 실업자가 됐다. 그리스는 유로존 탈퇴 위기까지 내몰렸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총 3200억 유로(약 468조원)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받았다. 하지만 구제금융의 대가는 혹독했다. 일명 트로이카(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는 그리스를 살리기 위해 추가 지원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강도 높은 정부의 개혁을 내걸었다.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공무원 수를 대폭 감축했다. 이와 함께 세금 인상, 공공 부문 임금 통제, 광범위한 민영화와 복지 혜택 축소를 포함한 강도 높은 긴축 조치를 이어갔다. 연금만 해도 11개 이상의 삭감 계획이 승인됐다.
긴축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은 길었지만 재정건전성이 강화되는 등 경제 부활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과감한 예산 삭감을 통해 정부 지출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정부 부채의 부담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팬데믹 동안 그리스의 정부 부채는 GDP 대비 210%까지 높아지긴 했지만 2023년 기준 약 160%까지 떨어졌다. 경제 전문가들은 그리스의 부채 비율이 2026년에는 이탈리아(144.4%)보다도 낮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제 부흥’ 총리의 시장 친화 정책, 돌아온 투자자들
그리스의 경제위기 극복에 전환점이 된 것은 2019년 새롭게 집권한 보수파 정치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다. 지난 4년간 그리스의 경제 회복을 이끈 그는 지난해 6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스 국민들 또한 과거의 포퓰리즘 정치의 그림자를 벗어내고 ‘과감한 경제개혁’을 선택한 것이다.
‘경제 부흥’을 걸고 총리직에 취임한 그는 구조 개혁을 통해 ‘시장 친화적인’ 경제정책을 밀어붙였다. 기업 관련 규제는 과감하게 줄이고 최저임금은 인상하는 조치를 취했다. 지난해 4월 최저임금을 월 780유로로 인상한 데 이어 4년 뒤 950유로로 인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관료적 형식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2021년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중장기 경제성장 프로그램인 ‘그리스 2.0’이다. 2021년 팬데믹 이후 그리스 정부는 EU 회복기금 312억 유로를 포함해 총 589억 유로를 투자하는 국가경제회복 프로그램 ‘그리스 2.0’을 수립했다. 2021년 7월 ECOFIN의 승인을 받아 추진 중에 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5개년 계획을 통해 ‘그린 전환, 디지털 전환, 고용 인재 개발, 그리고 민간 투자 및 경제 전환’의 4개 부문을 축으로 한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총 68개 분야의 106개 프로젝트의 추진을 계획 중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장 원동력’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의 문제아’에서 ‘유럽의 우등생’으로
결과는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그리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22년 그리스의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액은 79억2800만 유로에 달한다. 2021년 53억5500만 유로 대비 48% 증가했다. 2002년 공식 데이터를 발간한 이래 최고치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76.8% 이상 증가한 수치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테네 동쪽에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는 데 10억 유로를 투자했다.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도 6억5000만 유로를 들여 그리스에 연구개발(R&D) 허브를 구축 중이다. 미국, 중국, 유럽의 기업들은 그리스의 재생에너지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스코와 JP모간, 메타 등 다국적기업들의 투자 또한 이어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돌아오며 경제가 활력을 찾기 시작하자 주식과 채권에도 외국인 자금이 밀려들고 있다. 그리스 증시의 AGT 지수는 2023년 30%가량 올랐다. 유럽에서도 손 꼽히는 상승률이다. 수출도 증가했다. 2021년 기준 그리스의 상품 수출 규모는 2010년과 비교해 90% 정도 늘었다. 같은 기간 유럽 전체 평균 수출 규모는 42% 성장하는 데 그쳤다.
돌아온 것은 투자자들뿐만이 아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관광객들이 돌아오면서 그리스 경제의 토대라 할 수 있는 관광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2023년에만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그리스를 찾았다. 이로 인한 매출만 210억 유로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호텔과 에어비앤비 수요가 급증하면서 부동산 시장도 활력을 찾고 있다. 특히 최소 50만 유로의 부동산을 구입할 경우 EU 거주 자격이 부여되는 프로그램 등으로 인해 현재 그리스 곳곳에서는 새로운 건물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활력을 되찾고 있는 시장 분위기는 경제지표에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는 2021년 8.4%, 2022년 5.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EU 평균 경제성장률(2021년 5.4%, 2022년 3.5%)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EU 집행위원회는 2023년 그리스 경제는 완전히 회복한 관광업에 힘입어 2.4%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유로존 경제성장률의 두 배 이상인 수치다. 예상보다 빨리 부채를 상환하면서 2022년 3월에는 마침내 구제금융을 졸업했다.
국가 부도 위기 당시 거의 30%에 육박했던 실업률 또한 11%로 줄었다. 여전히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근 10년간의 실업률과 비교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 특히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 고용 증가가 지속될 것으로 보여 향후 실업률은 더욱 낮아질 가능성이 높게 전망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가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 적격’으로 상향하기도 했다. 13년 만에 ‘정크’ 딱지를 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연금 및 대형 투자자들이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매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럽의 문제아’로 일컬어지던 그리스는 현재 유로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가 됐다.
이정흔 객원기자 luna.jh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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