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의 깊은 한숨…결국 최창원 히든카드를 빼들다 [안재광의 대기만성's]
SK의 작년 말 인사는 파격이었어요.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이끄는 조대식 의장을 비롯해서 박정호, 김준, 장동현 부회장이 한꺼번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분들은 ‘부회장 4인방’이라고 해서 SK의 실세였죠. 실세의 힘을 뺐다는 건 SK에 위기 의식 같은 게 있어서였겠죠.
‘SK, 잘나가는 것 아니었나’하고 생각하실 분도 많을 텐데요. 요즘 각광받고 있는 반도체와 배터리를 SK가 다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에 이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2등이고, 전기차 배터리는 글로벌 톱5에 들고요. 남들 다 부러워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짰는데, 잘했다고 칭찬해도 모자란데 책임을 묻듯 확 바꿨습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진짜 위기가 맞습니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으로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선임된 것입니다. 권력은 부모·자식 간, 형제간에도 안 나눈다는데요. SK는 굉장히 이례적으로 사촌 동생에게 최고 권력을 넘겨주는 일을 한 겁니다. SK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지, 사촌 형제간 경영의 의미는 뭘까요.
◆최창원, 케미칼·가스 통해 경영 능력 입증
우선 최태원 회장으로부터 최고 권력을 위임받은 최창원 부회장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이번 인사의 의미가 파악됩니다. 부친이 바로 SK의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업주의 아들입니다.
최종건 회장이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해서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경영권이 갔는데요. 최종현 회장이 2대 회장이었고, 최종현 회장 사후엔 그 장남인 최태원 회장이 그 뒤를 이었어요.
최창원 부회장은 부친이 세운 회사에서 사촌 형님을 ‘모시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계열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실력을 키웁니다. ‘맡겨진 일을 잘한다’는 좋은 평가를 받아요. 최창원 부회장의 형 최신원 회장이 여러 구설과 논란에 휩싸인 것과 달랐어요.
2007년 SK케미칼 대표로 취임했고 2011년에는 SK가스 대표에도 오르죠. SK ‘변방’ 취급을 받았던 이들 회사는 최창원 부회장이 맡은 뒤 완전히 달라져요.
SK케미칼은 원래 주력사업은 섬유였는데 바이오 회사로 탈바꿈 시킵니다. 역대 최고의 공모주 중 하나로 꼽히는 SK바이오사이언스가 SK케미칼의 바이오 사업부였습니다.
SK가스도 확 달라졌죠. 이 회사는 원래 LPG를 해외에서 들여와서 유통하고 판매하는 게 주된 사업이었는데, 화학 사업으로 확장해요. 플라스틱 원료가 되는 에틸렌, 프로필렌 이런 소재는 원래 석유 정제할 때 나오는 나프타를 주된 재료로 쓰는데요. LPG도 수소를 떼어내면 프로필렌이 됩니다. 이 사업을 전문으로 할 SK어드밴스를 세워서 2016년부터 프로필렌 생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첫 해 600억원, 2017년 700억원, 2018년 900억원 이렇게 이익을 늘려가면서 효자 사업이 됐죠.
SK가스는 울산에 LNG와 LPG를 동시에 연료로 쓸 수 있는 발전소를 짓고 있어요. 올 하반기 가동 예정이에요. LNG와 LPG가 같은 가스 같아 보여도 가격 차이가 좀 있거든요. 그래서 LNG 비싸면 LPG를 때고, LPG 비싸면 LNG를 쓰는 게 가능해지죠. 발전소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연간 매출 1조원, 이익 2000억원 이상이 발생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발전소 사업을 위해서 울산에 대규모 LNG 탱크와 접안시설까지 짓고 있고요.
◆잇단 투자실패로 손실 늘어
그러니까 최창원 부회장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SK 2세 경영자 사이에서 경영 능력은 대단히 높다는 평가가 중론입니다.
최창원 부회장이 이렇게 사업을 키워 놓으니까 SK케미칼과 가스 지분을 떼어서 아예 나갑니다. 사업을 키웠고 경영 능력도 입증했으니 최태원 회장이 떼준 거이죠. 그래서 지분 구조로 보면 최창원 부회장이 SK디스커버리란 지주사를 통해 SK케미칼, SK가스 등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SK디스커버리는 최창원 부회장 지분이 40%가 넘어서 단독 최대주주이고요. 최태원 회장의 SK와는 지분 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근데 SK 상황이 어떻길래 본인 왕국 챙기기도 바쁜 최창원 부회장까지 불러야 했느냐. 심각합니다. 돈 잘 벌던 SK가 최근 몇 년 새 돈이 쪼들릴 정도로 형편이 안 좋아졌어요.
이유는 많은데 하나만 꼽자면 대규모 M&A 때문입니다. 반도체부터 보시죠. SK하이닉스죠. SK가 2012년 이 회사 사고 얼마나 재미를 많이 봤습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잖아요. 연간 10조원 버는 건 일도 아니었고, 20조원씩 이익을 낼 때도 있었어요. 잔고가 넘쳐나니 이 돈으로 경기도 용인에 120조원짜리 반도체 단지를 짓네, 인텔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사업부를 11조원에 사네 등등 통 큰 투자를 줄줄이 하죠.
특히 손실이 많이 난 M&A가 있어요. 2021년에 인수한 인텔 낸드 사업부입니다. 인수할 때도 ‘비싸게 샀다’는 말이 많았는데요. 이후 상황을 보니 정말 비싸게 샀습니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 가격이 크게 떨어졌거든요. SK하이닉스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평균 판매가격은 2022년 1분기만 해도 테라바이트당 112달러였는데, 2023년 2분기 46달러로 60% 가까이 폭락했죠. 이 탓에 SK하이닉스의 낸드 부문 적자는 분기당 2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인텔 낸드 사업부의 작년 3분기까지 순손실이 3조6000억원을 넘겼고요. 완전 자본잠식에 빠져서 돈을 퍼 넣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좋지 않은 M&A 사례는 이것 말고도 수두룩합니다. SK그룹의 지주사인 SK는 투자형 지주사란 개념을 들고 나왔었는데요. 한마디로 워런 버핏의 벅셔 해서웨이처럼 투자 잘해서 떼돈 벌겠다는 개념입니다. 근데 이게 말이 좋아 워런 버핏이지 말처럼 쉽지가 않잖아요. 투자한 뒤 손실을 낸 게 많아요. 미국 플러그파워가 대표적입니다. 2021년 1조8000억원을 주고 플러그파워 지분 10%, 5140만 주를 취득했습니다. 이때 취득가격이 주당 29달러가 넘는데요, 이 회사 주가는 올 들어 3달러 선으로 내려앉았어요. 주식 산 뒤에 주가가 90% 가까이 폭락했어요. 1조8000억원에 산 주식 가치는 2000억원에 불과해요.
◆투자 재점검 나설듯
이것뿐인가요. SK가 한국판 아마존을 만들겠다며 진짜 아마존하고 손을 잡은 11번가는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SK는 11번가와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 과거 이 회사에 지분 투자를 한 펀드들이 있는데, 이 펀드가 SK에 약속한 돈을 달라고 했더니 11번가를 그냥 가져가라고 던져버렸어요. 온라인쇼핑 점유율을 보면 쿠팡과 네이버가 저만치 앞서가고 있고, 신세계의 지마켓에도 못 당하고요. 이대로 가면 테무나 알리익스프레스에도 아마 뒤처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터리도 문제인데요.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공장을 여기저기 짓느라 십 수조원을 썼는데요. 규모가 커져도 적자 해소가 안 됩니다. 2021년에 SK이노베이션에서 분리된 SK온의 적자는 2022년 1조원을 넘어섰고 2023년에도 3분기까지 5000억원대 적자를 기록합니다.
SK 내부 문제는 이것 말고도 많은데요. 최태원 회장도 개인적으로 너무 바빴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하면서 부산 엑스포 유치 운동도 재계 총수 중에 가장 열심히 했고요. 윤석열 대통령 해외 나갈 때 동반해서 많이 나가기도 했잖아요. 경영에만 전념하기 힘들었단 얘깁니다.
최창원 부회장에 권한이 많이 갔지만 SK 모든 계열사에 다 관여하진 않을 것 같고요. 아마 큰 건만 보겠죠. 특히 대규모 투자, M&A 이런 것 위주로 재점검을 할 것 같습니다. 계열사 사장님들 군기반장 역할도 하고요. SK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통신 등등 굉장히 광범위한데 이번 기회에 재점검 하고 다시 도약할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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