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쪼고 깎고 다듬고… 몸의 노동과 거대한 자연의 ‘교감’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조각가와 재료 수평적인 관계
물리적인 힘 주고받으며 제작
매끈한 표면과 거친 단면 공존
이중적 요소 병치 ‘아상블라주’
대리석 표면에 무수히 작은 홈
빛·어둠 교차하는 ‘피아트 룩스’
백진기는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학교(L’accademia di belle art di Carrara)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돌아와 ‘석조(石彫)’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조각가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리석을 생산하며 대리석 조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카라라에서 공부한 그는 조각의 고전적인 형식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 보기 위해 그 길을 선택했다. 그가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을 때,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미술 현장의 분위기는 전통적인 매체에서 벗어나 대부분 설치미술과 뉴미디어 아트로 특정되는 동시대 미술로의 전환점을 돌던 때다. 그런 경향에 역행하듯 조각의 전통 매체를 탐구하기로 한 그는 재료의 물성을 다루면서 실존적인 조각의 ‘행위’와 원형의 물질과도 같은 ‘재료’ 간 창의적인 교감이 만들어낼 조형적 ‘형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16세기 초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거친 대리석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형상을 찾아내 그 잔해를 제거하고 아름다운 조각의 윤곽선을 완성하는 것으로 조각가의 창조적 역량을 뽐냈다. 그러한 역사 속 미켈란젤로의 후예들이 과거의 유산을 지켜내는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에서, 백진기는 첫 개인전 ‘사랑, 그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얘기들(Amore, Quei Magnifici e Preziosi Ricordi)’(2012)을 개최해 조각가로서의 첫 발걸음을 뗐다. 그는 “알피 아푸아네(Alpi Appuane) 산맥의 거대한 대리석 산에 매료됐던” 유학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대리석과의 교감을 통해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희구’와 ‘실존적 움직임’을 추상적 형태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거대하고 오래된 자연의 질료에서 삶의 원형과 생성, 변화 등에 얽힌 경이로운 에너지를 보았을 테고 그것과 교감할 수 있는 조각가의 실존적 노동 행위의 오랜 궤적을 좇고 싶었을 테다.
귀국 후 그는 고향인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전에 사셨던 집을 작업실로 고쳐 쓰고, 앞마당에 야외 작업장을 꾸려 직접 돌을 옮기고 깎고 세우고 매만지면서 추상적인 형태의 돌 조각을 제작한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작업실에서, 그는 석공처럼 돌을 쪼고 다듬는 노동의 행위를 예찬하며 땅 위에 세울 만큼 견고하고 실존적인 조각의 형태를 탐구한다. 되돌아보면 고전적인 조각의 개념과 형식에 대한 관심이 낡고 오래된 것처럼 여겨져 쇠퇴에 접어든 때가 있었다. 조각에 대한 인식이 크고 무겁다는 물리적 특징으로 고정돼 버린 탓에 이동과 변화를 미덕으로 하는 시대에 더욱더 불리한 조건처럼 여겨져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쇠퇴와 편견을 딛고 고전적인 조각의 매체와 형식을 새롭게 탐구할 동시대 조각가로서의 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그의 앞에 주어진 것이다.
조각가 백진기의 작업은 크게 몇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주제적 측면에서, 그는 ‘생명’의 근원적 원리와 ‘생동’의 기운을 중심으로 추상적인 형상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성찰과 사유에 다가가려 한다. 조형적 측면에선 생명과 생동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라는 화두를 붙잡아 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강조한 ‘반복’과 ‘겹침’의 표현성을 드러낸다. 수행적 측면에서 그는 크고 무거운 질료를 다루는 조각가의 노동에 큰 가치를 둔다. 고대로부터 있어 왔던 창조 행위의 근원으로 석공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조각가의 ‘몸’과 돌이란 ‘질료’가 수평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물리적인 힘을 주고받는다는 생동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구축해 온 이런 작품 세계의 모든 과정은 2012년 첫 개인전 이후 지난해 ‘첫 악장:제시부(First Movement:An Exposition)’(2023)까지 총 13회의 개인전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을 전시 제목으로 가져온 ‘아모르 파티(AMOR FATI)’(2016)는 조각하는 근본적 행위에 주목한 개인전이었다. 그는 “조각하는 행위인 긁고, 파고, 새기는 원론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 일종의 “과정에서 결과를 찾는 행위”로, 미리 정해 두지 않은 임의의 형태와 만나게 하는 수행성을 추구했다. 마치 구도자와 같이 창조의 행위 안에 내재한 노동의 수행성을 깨닫기 위함인지, 백진기는 신체 행위의 파동과 조각 재료의 물성이 접촉해 발생하는 능동적인 형상의 출현에 다가갔다. 예컨대, ‘더 퍼스트 원(The First One)’(2016)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멩이를 주워와 받침대 위에 얇은 금속 파이프를 세운 채 허공에 띄우듯 파이프 끝에 돌을 고정한 형태다. 그것은 모태와도 같은 큰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긁히고 파이고 쪼개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임의의 돌멩이 하나가 조각적 형태가 되는 마술 같은 순간을 환기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같은 형태를 복제하듯 반복해서 만들어 놓고는 그것들로 거대한 원형(圓形)의 풍경을 이루게 했다.
‘아상블라주(Assemblage)’(2016) 연작도 같은 시기의 작업으로, 단순한 조각의 행위가 이끌어낸 추상적 형태의 결합을 보여준다. 아상블라주 연작에서는 가공한 석재의 매끄러운 표면과 그것을 잘랐을 때 드러나는 거친 단면이 각각의 양가적인 질감을 드러내면서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이중적인 요소들 간의 병치 구조를 뽐낸다. 이를테면 표면과 내부, 매끄러움과 거침,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생성과 파괴 등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추상적인 조각의 형태 안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중적 효과는 그의 조각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한데, 음양의 대립과 조화처럼 조각적 형태의 궁극적인 목표에 관해 그가 지속해온 사유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라틴어로 ‘빛이 있으라’는 의미를 가진 ‘피아트 룩스(Fiat Lux)’ 연작은 조각가 백진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삼차원의 실체이자 조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빛은 오래전부터 조각가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백진기는 피아트 룩스 연작에서 대리석 표면에 무수히 작은 홈을 파내듯 반복적인 패턴의 점을 새겼다. 그것은 주로 원판형 대리석을 지지체 삼아 그 표면에 방사형의 패턴이나 유동적인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일렁이는 움직임을 눈앞에 실체화했다. 그는 실제로 해안가의 풍경에서 목격했던 바위의 풍화 현상 등을 참고해, 거대하고 단단한 돌이 물리적 힘의 작용을 통해 지속적인 변화와 더불어 제 안에 잠재돼 있던 형상들을 출현시키는 ‘창조’와 ‘생성’의 원리에 다가갔다. ‘러싱 윈드(Rushing Wind)’ 연작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형태 안에서 순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추상적인 조각의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조각가의 행위와 질료의 본성 간 창조적인 힘의 교환을 상상하게 한다.
■ 백진기 작가는
백진기는 알피 아푸아네 산맥의 거대한 대리석 산에 매료됐던 이탈리아 유학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희구’와 ‘실존적 움직임’을 추상적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석재의 물성을 중요한 조각 작업의 질료로 다루는 작가는 비와 바람, 빛 같은 비물질적 자연 요소가 시간과 결합해 암석에 물리적으로 새겨지는 풍화나 침식, 균열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재해석하거나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공공미술과 환경조각을 통해 조각을 건축, 자연, 환경 등과 관계 지으며 모색했던 경험의 측면에 접근해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한강 조각 프로젝트’(2023)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개인전 ‘첫 악장:제시부(First Movement:An Exposition)’를 마친 백진기는 내년 환조 작품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다룬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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