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휴대폰에서 읽는 의료위기

한겨레 2024. 1. 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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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19일 대구 중구 경북대학교병원 응급실 앞 모습. 연합뉴스

[똑똑! 한국사회]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인공지능(AI)이 탑재되어 13개국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해주는 휴대폰이 나왔다. 모두들 이 기기가 삶을 얼마나 편리하게 해줄 것인가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먹구름이 몰려온다. 언어의 장벽이 없어진 세상이 오면 우리나라의 우수한 의료인력이 썰물처럼 외국으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렇지 않아도 위기에 처한 한국 의료가 붕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15년 전 캐나다 이민을 감행했다. 한국에서 의사로서 안정적인 삶을 누렸기에 몇번을 망설였지만, 정신장애를 겪는 딸이 너무 힘들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결정적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집을 얻고 차를 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하나같이 큰돈이 드는 일이었다. 피땀 흘려 번 돈을 남의 나라에 갖다 바치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가만히 보니 전세계에서 캐나다에 오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캐나다 정부는 재산이 많은 사람, 전문기술이 있는 사람, 자기 나라에 당장 부족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이민을 받았다. 평화로운 사회, 행복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건 당위로만 여겼을 뿐, 앉아서 돈 버는 길이기도 한 줄은 처음 알았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도 의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환자들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진료하기가 날로 어려워졌다. 그 뒤로 15년, 의료 현장은 갈수록 황폐해졌다. 한때 우리 의료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값싸고 수준 높았으며 접근성 또한 뛰어났다. 지금은 어떤가? 응급 상황에 부닥친 환자가 받아줄 병원을 찾지 못해 길에서 숨지는 일이 더는 낯선 뉴스가 아니다. 내과, 외과 등 생명과 직결되는 진료과는 지원자가 거의 없다. 깊은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의대 교수들이 견디지 못하고 대학병원을 뛰쳐나온다. 붕괴 징후가 도처에 넘치는데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의료 문제가 수십년간 악화한 까닭은 뭘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야 할 자리에서 옳으냐 그르냐만 따지기 때문이다. 의료는 복잡하다. 장차 수명이 길어지고, 치료제는 물론 신체 기능을 강화하거나 행복을 증진하는 약과 치료가 쏟아져 나오면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경제, 교육, 행복, 복지, 분배, 정의 등 어느 것 하나 의료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누구나 한가지 답만 내놓는다. “의사들이 돈밖에 몰라서 그래!” 의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의사인데 무슨 말을 해도 같은 답이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 의사들은 무기력하고 불행하다.

시각을 밖으로 돌려보자.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소위 이민국가에서 이민은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아예 이민부와 장관을 따로 두고 필요한 인력을 유치한다. 이민 승인 기준은 다르지만 모두 의사를 비롯한 양질의 의료인력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사회 분위기도 의사를 존중한다. 의사는 가장 존경하는 직업에서 항상 순위권이다. 개인적으로 의사와 정부가 제한된 자원으로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부럽기 그지없다.

의사는 전문직이다. 의사를 키우려면 자비 부담 말고도, 사회에서 2억~3억원을 투자해야 한다. 요즘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죄다 의대만 가려고 한다지만, 이들 역시 ‘돈밖에 모르는 놈’ 취급을 받고, 점차 무기력하고 불행해질 것이다. 탈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해 언어장벽이 없어진다면? 이민국가들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대차대조표를 그려보자. 자원이 없어서 우수한 인력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의사로 키워 바로 다른 나라에 빼앗기는 꼴이다.

기술 발달은 막을 수 없다. 언어장벽이 없어지는 세상이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 의료의 예를 들었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민국가로 우수한 인력의 유출이 현실화될 것이다. 과학기술 연구비를 무지막지하게 깎는 정부와 인공지능 휴대폰을 나란히 놓고 보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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