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2부’ 김태리의 지금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미움을!’ 배우 김태리가 마음속 깊이 새긴 인생의 좌우명이다. 이것이 바로 김태리가 매 작품마다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경신해온 비결이었다.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2022년 개봉한 영화 '외계+인 1부’다. '외계+인’은 외계인과 도사들이 미지의 신검을 찾아 시공을 넘나드는 내용의 SF 판타지 영화로 '도둑들’과 '암살’로 '쌍천만’ 감독에 등극한 최동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었다. 김태리를 비롯해 류준열, 김우빈, 이하늬, 염정아, 조우진, 김의성 등 스타급 배우가 대거 등장해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최종 관객은 154만 명에 그쳤다. 난해한 소재와 산만한 전개, 결말을 알 수 없는 연작 영화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지난 뒤 개봉한 2부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누적 관객 64만 명을 동원하며 입소문을 타고 있어서다. 1부에 대한 평가가 갈리면서 2부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2부 공개 후 긍정적인 관람 평이 이어지는 중이다. '외계+인 1부’도 OTT 플랫폼에서 역주행하고 있다. 여기엔 배우들의 공이 크다. 무대 인사, 관객과의 대화, 예능프로그램 출연, 인터뷰까지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김태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이어졌던 인터뷰와 홍보 행사로 피곤할 법하지만, 씩씩하게 인사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데뷔 후 늘 긴 머리를 고수해왔던 그였기에, 짧은 헤어스타일이 시선을 끌었다.
"영화는 인연을 만들어가는 과정"
촬영 중인 드라마 '정년이’의 극 중 캐릭터에 맞춰 머리를 자르게 됐어요. 어렸을 때는 짧은 머리를 많이 했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이에요. 아주 만족스러워요. 이미지 변신을 원했던 것도 있고, 현재 맡은 캐릭터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되거든요.
‘외계+인 2부’가 공개된 뒤 기분이 어땠나요.
1부가 흥행 면에서 아쉽기도 했지만 저는 감독님의 노력과 시간을 잘 알기에 슬프기도 했어요. 그래도 '우리에게 중요한 건 2부다’라고 생각했죠. 그동안 열심히 감독님을 응원해드렸어요. 2부를 보면서 많은 비밀이 풀리고, 관객이 감독님에게 기대하는 색깔이 충분히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로서도, 관객으로서도 굉장히 만족하면서 봤어요.
그동안 결말을 알려달라는 요청도 많았을 것 같아요.
누군가 결말에 관해서 물어보면 의미심장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어요. 유도 질문에도 "아 그래?" 하고 답변할 뿐이었고요. 2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웃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납니다. 기준이 궁금해요.
우선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작품을 고르는 시점에 좋은 작품이 찾아오는 게 가장 커요. 그리고 저는 시나리오를 먼저 보는 편이에요. 그다음 맡을 캐릭터를 생각하면서 전작에서 연기한 캐릭터와 어떻게 다른지를 통해 매력을 느껴요.
‘외계+인’은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감독 최동훈’이라고 쓰여 있는 시나리오가 제 손에 들려 있다는 것 자체로 감격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신기했고 너무 행복했어요. 개인적으로 감독님 팬이었고, 배우가 된 이후부터는 당연히 '언젠가 함께하고 싶다’고 꿈꾸던 감독님이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더 좋아졌죠.
최동훈 감독은 '외계+인’에 대해 "이건 그냥 인연과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김태리는 영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만났고, 인연으로 이어졌다. 감독뿐 아니라 좋은 선후배 배우들과 만남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동훈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요.
영화의 세계관과 이안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였죠. 우리의 선택이 어디에서 오는가와 같은 이야기도 했어요. 감독님은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영화는 인연에 관한 이야기니까 인연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인가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죠. 문소리 언니와 두 작품을 같이했는데, 최근에 '정년이’라는 드라마도 함께하게 됐거든요. 언니가 특별 출연한 '1987’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네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이어서 모녀 관계인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인연이 많아서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류준열 씨와 '리틀 포레스트’에 이어 '외계+인’에서 두 번째 만났습니다.
영화 이후에도 꾸준히 만나면서 서로의 속사정이나 고민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그런 사람이 영화 촬영 현장에 함께 있는 것 자체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그리고 선배님들께도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이 작품은 특히 너무도 좋은 선배님과 함께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SF 액션 영화다 보니, 힘든 장면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액션은 사실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억에 남는 신은 엔딩 장면에서 모두와 헤어질 때였어요. 이별 장면이라 감정을 잡아야 했는데 주변에 농담과 변신, 폭발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어서 몰입이 잘 안 됐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기도 했죠.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복잡한 것이 전부 다 녹아 있고, 하나하나 모든 감정이 와닿아서 무척 놀랐어요. 연출의 힘인 것 같아요.
와이어를 타는 장면도 많았는데, 무섭지 않았나요.
와이어 타는 건 너무 재미있죠! 제가 원래 롤러코스터도 잘 타는 편이거든요.
영화에는 다양한 마법의 물건들이 나옵니다. 어떤 물건에 가장 욕심이 나나요.
분신술을 부릴 수 있는 부적이요. 살다 보면 '몸이 3개만 더 있으면 워라밸이 잘 맞겠다,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겠다’ 할 때가 있잖아요(웃음).
"배우와 나를 떼어낼 수 없다"
한복이 잘 어울리는 배우로 꼽히는데, 이번 영화에서 무복도 잘 어울렸습니다.
어깨가 좁아야 한복이 잘 어울린대요(웃음). 예전엔 직각 어깨가 아닌 게 콤플렉스였어요. 배우가 되고 난 뒤 한복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게 장점이구나’ 생각했죠. '외계+인’에서는 남자 무복을 입었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제가 입은 옷이 고려시대 남자 옷이라고 하더라고요. 색감도 좋았어요. 영화에서 스타일이 주는 힘이 큰 것 같아요. 옷뿐만 아니라 헤어, 메이크업도 마찬가지로 연기를 도와주는 장치죠.
‘외계+인’에서 비교적 진지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코믹 연기에 대한 욕구도 있나요.
언제나 재미있는 역할을 맡고 싶어요. 그런데 코미디는 정말 어렵거든요. 진짜 어려운 영역이어서 재능도 필요한 것 같고요. 이번 영화에서는 선배님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진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나 제 연기 톤이 그 안에서 튀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는데 최동훈 감독님이 "나를 믿어라" 하셔서 따라갈 수 있었어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얼굴을 알리게 됐습니다.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나요.
따로 준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해보고 싶어요.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다 보니 모든 현장이 각각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외국 감독님과 광고 작업을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외국 배우들은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할까’ '같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구체적인 논의는 없지만, 제의가 온다면 언제나 열린 마음이에요.
연극 무대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는데, 요즘도 연극을 보나요.
틈날 때마다 보고 있어요. 제일 친한 친구가 연극을 하고 있어서 정보도 많이 얻고 자주 보러 다녀요. 타이밍이 맞아야 하겠지만, 무대 연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진심을 가지고 연극 무대에 다시 서고 싶어요.
지금은 배우로서 또 인간 김태리로서 어떤 시기를 지나는 것 같나요.
매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떨 때는 배우와 제가 완전히 한사람이었다가 어떨 때는 분리가 되기도 하고요. 지금은 일과 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기 같아요. '외계+인’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현장에 가면 막내인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드라마 현장에선 또래 중 나이가 제일 많아요. 막내에서 언니가 되어가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시기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서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 됐으면 해요. 매 순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롤 모델이 있나요.
아직 여기에 맞는 답변은 못 찾은 것 같아요. 박찬욱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2가지의 감정이 있다면 동시에 표현할 수는 없다. 대신 어떤 감정의 스위치가 빠르게 켜지고 꺼질수록 좋은 배우다." 저는 최동훈 감독님의 영화 캐릭터에서 그런 면을 봐요. 최 감독님의 영화 캐릭터가 롤 모델이라면 롤 모델인 것 같습니다. 아직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네요.
강철 멘털의 비결 "오늘만 산다!"
멘털 관리 비결이 있나요.
저는 청소년기를 생각 없이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 후폭풍을 성인이 된 후에 크게 맞았어요. 이후론 '고민하며 살자, 사유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남기면서 노력해왔어요. 문제가 생기면 복기하면서 저 나름의 이유를 찾아봤고요. 또 배우 일에도 영향을 주는 부분인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와 나의 다른 점과 그의 장점을 찾아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는지도 궁금해요.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미움을!’ 대학생 시절 본 중국집 간판에 붙어 있던 글귀였어요. 그걸 본 이후 동기들끼리 싸움이 나면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미움을!"이라며 말렸어요. 한참 지나서 문득 '이거 너무 멋있는 말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 좌우명으로 삼아도 되겠더라고요. 지금까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렇게 말하게 되네요.
커리어만 보면 데뷔 후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힘든 시간도 있었나요.
슬럼프는 있었죠. 슬럼프를 벗어난 순간에는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저는 또 새로운 지점에 있고 새 이야기가 생긴 듯해요. 그래서 그때의 시간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요.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시간이 흘러갈 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난날을 복기하는 거죠. 이유를 찾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 시간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기를 쓰는군요.
요즘은 일기를 쓰는 대신 순간순간 메모를 많이 해요. 작품마다 캐릭터 노트를 만들어두는데 지금처럼 인터뷰할 때 도움을 받고 있어요.
매년 마지막 날에 새해 계획을 세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2024년 계획이 있나요.
이제는 안 해요. 언젠가 또 할 수 있지만, 요즘은 '오늘만 산다’가 되더라고요. 제가 1월에 딱 이틀 쉬었어요. 그중 하루가 1월 1일이었는데, 진짜 별생각 없이 보냈어요. 낮잠도 자고 푹 쉬었죠. 오늘만 산다는 게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하루하루 집중하면서 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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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아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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