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과 동유럽의 분기점, 인구감소 대응

한겨레 2024. 1. 2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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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흑사병의 참상을 그린 16세기 벨기에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죽음의 승리’.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상읽기] 이철희ㅣ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지난번 칼럼에서 꺼냈던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이야기를 한번 더 해야겠다. 기근과 역병이 창궐했던 시대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재앙이었던 흑사병은 중세 유럽 봉건사회를 뿌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당시 지배층이었던 봉건 영주와 교회 성직자들은 “죽음의 사신” 앞에서 피지배층인 농민들과 다름없이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임을 드러내며 힘과 권위를 잃었다. 집단적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회적인 병리 현상도 만연했다. 사람들은 재앙의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찾았으며, 그 결과 곳곳에서 유대인 학살과 박해가 자행되었다.

흑사병이 가져온 충격은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혼란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규모 역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는 봉건제를 무너뜨린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인구가 줄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토지를 보유한 봉건 영주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민(농노) 간의 전통적·관습적인 균형이 파괴되었다. 일손이 부족해진 서유럽의 영주들은 농민들을 붙들기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며 애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들 부담은 줄었고, 봉건제의 핵심이었던 노동지대(부역)는 점차 고정된 화폐지대로 전환되었다.

이제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서 얻은 몫을 자신의 자산으로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영주들은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고 안정적으로 지대를 납부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방금”을 받고 부자유 농민인 농노들을 자유로운 소작농으로 풀어주는 영주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수백년 동안 유지되었던 서유럽의 봉건제는 이렇게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는 병으로 숨진 이들과 봉건 영주들에게는 재앙이었을지언정, 살아남은 다수의 사람에게는 축복이었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토지를 포함한 자원과 인구 간의 균형을 호의적으로 바꾸었고, 이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연구는 영국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이 흑사병 직전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약 두배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급감했던 인구 역시 빠른 증가세로 돌아섰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는 무너졌지만, 그 폐허 위에 근대 국가들이 태동했고 서유럽은 계몽주의와 종교·과학·산업 혁명을 통해 경제적·정치적 부흥과 팽창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유럽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에서는 오히려 봉건제가 강화됐다. 이 지역 영주들은 흑사병이 가져온 위기에 대응하여 오히려 농민의 부역을 늘리고, 공동지를 수탈했으며,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자유농민까지 예속시켜 토지에 구속하였다. 동유럽의 농노제는 19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이 지역은 유럽의 부흥에 동참하지 못한 채 변방으로 남게 된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한가지 설명은 이동성의 차이이다. 다른 장원이나 도시로의 이주 가능성은 인구감소기에 서유럽 농민의 교섭력을 높인 요인이었다. 반면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가 덜 발달했던 동유럽 농민에게는 이동성이라는 수단이 없었다. 다른 설명은 국지적 시장의 존재 여부다. 가까운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서유럽의 농민은 생산물을 직접 판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동유럽에서는 원격지 무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영주들이 그 기회를 독점하였다. 동유럽에 비해 서유럽 농민의 촌락공동체가 더 강한 결속력과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차이점도 지적된다.

역병으로 사망이 늘었던 14세기 유럽과 달리, 21세기 한국에서는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더 희소한 존재가 된 아이들은 그만큼 귀하게 대접받고 더 행복해졌을까? 머지않아 청년 인구가 급감하게 되면, 이들의 노동 여건이 개선되고 삶의 질이 나아질까? 경제학 이론은 어떤 자원이 희소해지면 그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 알려주지만, 700년 전 유럽의 경험은 그러한 일이 늘,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탐욕과 담합으로 동맥경화를 앓는 사회에서는, 공정한 기회와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경직적인 노동시장에서는, 아동과 청년의 수가 아무리 줄더라도 이들의 가치가 높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극심한 경쟁, 고된 삶, 불안한 미래가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나라의 장래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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