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금감원, 기술신용평가 부실 운영 1년 넘게 제재 미뤄
평가 기관, 은행 입맛대로 평가서 제공
금감원, 4개 평가기관 제재심 일정조차 못 잡아
평가 기관, 은행으로부터 연평균 866억원 챙겨
금융감독원이 기술금융을 위한 기술신용평가(TCB) 과정에서 은행에 예상 평가등급을 사전에 제공하는 등 TCB 평가기관의 부적절한 행위를 적발하고도 1년이 지나도록 제재심조차 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TCB 평가기관은 은행의 입맛에 맞는 TCB 평가서를 제공하고 은행이 기술금융 실적을 부풀릴 수 있도록 도와 연간 수백억원의 수수료를 벌었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 은행 또한 이러한 TCB 평가를 통해 쌓은 기술금융 실적을 바탕으로 금융 당국이 제공하는 인센티브를 타냈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제도가 금융 당국의 느슨한 감독 탓에 은행과 평가기관의 배만 불리고 있는 것이다.
기술금융은 담보는 부족하지만 기술력은 우수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제도다. 중소기업이 은행에 기술금융 대출을 신청하면 은행은 평가기관에 해당 기업의 TCB를 의뢰한다. 은행은 TCB 평가서를 기반으로 기술신용대출의 금리, 한도 등 조건을 결정한다.
23일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은 지난 2022년 11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한국평가데이터, 이크레더블, SCI평가정보, 나이스평가정보 등 TCB 평가기관 4곳에 대한 검사를 마친 이후 위반 사항을 적발했지만, 제재심 일정조차 잡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사가 완료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제재 수위를 결정하기는커녕 제재를 위한 법률 검토만 진행 중인 것이다.
금감원은 비슷한 시기에 검사를 진행한 나이스디앤비에 대해서만 제재심을 완료했다. 기관에 대한 제재 수위는 높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제재심에서 확정된 기관 및 임직원 제재는 조만간 금융위원회 정례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다.
금감원은 이번 검사에서 평가기관들이 예상 평가등급을 평가 요청인에 제공하고, 평가등급 사전 협의 시 관대한 평가결과를 암시한 사실을 적발했다. 일부 평가기관에서는 기술·신용심사 시 허위·도용된 자격증을 검증하지 않은 채 TCB 평가서를 발급한 사실을 발견했다. 평가기관이 은행의 입맛에 따라 품질이 떨어지는 TCB 평가서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감사원이 실시한 금융위 정기감사에서도 TCB 평가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감사원의 TCB 평가서 3856건에 대한 표본점검 결과, 49%가 기술금융 인정대상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금융위는 TCB평가서가 첨부된 모든 대출을 기술금융통계에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로 기술금융의 69%는 TCB 평가서에도 불구하고 대출한도·금리에 혜택이 없는 일반대출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TCB 평가의 정확성·공정성이 부족하다”라며 “이를 적발한 금융위·금감원은 이들 TCB 평가기관의 업무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제재의 법적 근거가 없다며 내버려두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공정성·객관성이 중요한 평가에서 이러한 짬짜미 행위가 나온 것은 수수료 수익과 영업활동의 확대를 노린 평가기관과 기술금융 실적을 내야 하는 은행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가기관들은 TCB 발급을 통해 영업활동을 강화하고 은행으로부터 연평균 866억원의 평가 수수료를 받았다. 금융 당국은 기술금융에 대한 은행별 순위를 공개하고 있는데, 기술금융 실적이 은행 경영진의 성과와 연결되기 때문에 은행은 기술금융 실적평가(TECH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실제로 일부 은행에서는 핵심성과지표(KPI)에 기술금융에 높은 점수를 매겨 기술금융의 양적 확대를 유도했다.
또한, 기술금융 대출실적 평가 결과에 따라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 출연금에 대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은행이 기술금융을 확대한 이유로 보인다. 잘못된 TCB 평가를 통해 기술금융을 양적으로만 확대한 은행들을 중심으로 수백억원의 출연금 혜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은 최근 당국의 TECH 평가의 취지대로 일반대출 실적을 제외하고 최근 2회의 TECH 평가를 재평가한 결과, 2021년 하반기와 2022년 상반기 TECH 평가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한 A은행은 신보 및 기보 출연금을 241억원을 덜 납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평가기관과 은행의 행태는 TCB 평가의 객관성을 떨어뜨리며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애초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술금융 제도가 평가기관과 은행의 배불리기 도구로 쓰이고 있다”라며 “TCB 평가에 대한 제대로 된 감시 없이는 평가기관은 TCB 평가서를 남발해 수수료 늘리기에만 몰두할 수 있고, 은행이 지급해야 할 수수료가 늘어나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다음 달쯤 TCB 제도의 신뢰성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 제재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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