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나르시시스트가 전쟁 지도자로 돌아온다 [특파원칼럼]
미국 미디어는 혼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첫 대선후보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51% 득표율로 압승하자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이다. 우파인 폭스는 25분 발언을 모두 중계했지만, CNN은 10분으로 줄였고 MSNBC는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미디어들은 플로리다 주지사인 론 드샌티스를 이미 포기했고(그는 21일 중도 사퇴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에게 희박한 경쟁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트럼프가 헤일리에 대한 부통령 임명 논란을 촉발하면서 '아직 애송이'라는 틀 안에 가둬버린 듯하다.
뉴욕타임즈(NYT) 칼럼니스트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모린 다우드는 "과격한 리얼리티 TV쇼로 에미상 시상식장에서 성적인 농담이나 하고 있어야 할 팔십줄 나르시시스트가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또 백악관으로 돌아오려 한다"며 "이 모두가 사실이란 게 어리둥절하다"고 썼다. 현실감을 찾은 그는 "사기꾼도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로 그가 면책특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선거결과를 부정하면서 음모론을 내놓아 폭도들의 국회의사당 점거를 직간접 유인했다. 이 문제로 형사소추된 트럼프가 최근 재판에서 대통령으로서 면책특권을 주장하면서 재판을 지연시켜 대선에 재출마하려는 걸 지적한 거다.
트럼프는 지난해 4건의 형사사건에서 91건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이런 모든 추문도 그의 질주를 막지 못한다. 비결은 그가 주장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캠페인 덕분이다. 전직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는 "트럼프는 사실 한 명의 후보라기보다는 국가운동의 지도자"라며 "이 챔피언의 위력은 알려진 모든 법적 문제가 쌓여도 막을 수 없고, 그가 이끄는 거대한 국가적 움직임은 더 격화되고 팬덤의 분노는 계속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는 개인적인 치부 문제를 떠나 미국의 보수화 우경화 움직임을 대변하는 우두머리란 의미다.
미국 내에서 트럼프의 인기는 좌편향에 지친 백인들과 유대계의 합작품으로도 보인다. 억만장자인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중산층 이하 백인 노동계급을 대변한다. DEI(Diversity·Equity·Inclusion,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덕분(?)에 엘리트 직종이나 주류에서 밀려난 백인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역이용하고 있어서다. 이들이 미국으로 밀려온 새 이민자들에 대해 갖는 인종적 불만과 정치·사법·국제기관을 불신하는 뒤섞인 문제를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있다. MAGA를 지지하는 이들은 과거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그랬듯 트럼프가 제왕적인 결정으로 애매하고 미묘한 문제를 속시원하게 해결해주길 바란다.
사업가로서 트럼프는 첫째 딸 이방카를 쿠슈너와 결혼시켜 유대계와 혈맹을 맺었다. 독일계 이민자 3세는 트럼프는 네 번의 파산을 거치며 뉴욕 부동산의 80%를 가진 유대인들을 포섭하지 않고는 부동산 개발업을 확장할 수 없다고 절감했다. 그런데 그 사업적 동맹이 정치인 트럼프의 든든한 지원군으로도 쓰이고 있다. 트럼프의 기세가 다시 타오르는 시점에 중동에서 복수전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현 미국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화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국가들과 국교를 맺으라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권고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다.
첫 재임기간의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괴짜 수준이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농담을 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 만나 악수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는 진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적어도 4곳의 전장 혹은 긴장 지역에 대한 결정권이 그에게 주어진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대만을 넘어 한반도가 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는 분명 아니다.
뉴욕=박준식 특파원 win047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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