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남풍(南風)에 흔들리는 북한의 생존전략

김대중 칼럼니스트 2024. 1. 2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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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통일·민족 포기
‘대한민국 주적’ 협박 발언은
심각한 내부 이완 보여주는 것
北 MZ세대, 드라마 보며 한국 동경
‘南風’ 방치할 수 없는 지경
지금 북한은 도발할 여건 아니지만
핵무기 쓸 가능성은 남아 있어
우리도 핵무기 가져야 할 이유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은 연초 한반도 앞날에 관해 중요한 발언을 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시정 연설에서 북한 “헌법에 명기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삭제돼야 한다”며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헌법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발언은 이중 구조로 돼 있다. 하나는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허세를 더 이상 부리지 않겠다는 ‘뜻밖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하지만 한국이 그것을 북한의 열세로 보고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 단호히 대처해 한국을 초토화하겠다”는 ‘구태의연한’ 것이다.

북한에서 2022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 '한국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10대 소년 2명에게 12년 노동형을 선고하는 모습./BBC

우리도 두 갈래로 대처해야 한다. 하나는 북한이 이제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긍정하고 더 이상 한국을 침략하는 등의 허장성세를 버리는구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 ‘초토화’ ‘대사변’ ‘주적’ 등의 표현을 쓰는 ‘협박’에도 대응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북한의 양동작전에 시달려 온 우리는 김정은의 말 몇 마디에 홀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학습 효과를 터득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는 김정은이 왜 이제 와서 우리를 ‘대한민국’ 정식 국호로 호칭하면서 통일 포기, 민족 포기의 표현을 써가며 남북 공존의 개념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는가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왜 굳이 가정법(假定法)을 동원해가며 ‘한국이 전쟁을 일으키면’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 북한은 심각한 내부 변화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제1 적대국, 주적(主敵)으로 간주하도록 교육 교양 사업을 강화할 것”을 언급했다. 한국을 주적으로 지목하는 대목에서 왜 난데없이 ‘교육 교양 사업’이 등장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교육 교양 사업은 북한의 인민, 특히 청소년들이 한국의 자유로운 생활상과 문화에 크게 심취해 북한 사회가 흔들리고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씨는 10여 년 전 “북한의 미래는 영영 암울하기만 한 것이냐?”는 질문에 “북한에도 밀레니엄 세대가 있다”며 “그들이 사회의 중심적인 구성원이 될 때 북한의 독재 체제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고 했었다. 태 의원은 엊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도 “지금 북한의 MZ세대는 몰래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한국을 동경하면서 통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며 “김정은이 헌법에서 ‘민족’ 개념과 ‘평화통일’을 빼면서 MZ세대에게 ‘통일은 없다’고 단념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TV 프로에 나온 탈북민들의 증언을 봐도 지금 북한 사람, 특히 젊은 세대는 한국 열풍에 빠져있다. 철저한 단속과 과도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온갖 기기를 동원해 ‘한국’을 학습하고 동경하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의 부정부패는 이런 상황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제 이 남풍(南風)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서 통일, 민족 또는 그 어떤 것을 포기하고라도 ‘한국의 모든 것’과 결별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마침 북한 청소년 2명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죄목’으로 12년의 감옥형이 내려지고 북한 여성의 두발과 복장이 문제가 되는 뉴스가 등장한 것은 북한 당국이 사회 이완 문제에 얼마나 신경질적인지를 말해준다.

나는 지금 북한은 한국을 도발할 여건에 있지 않다고 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앞서 지적한 내부의 이완과 남한 동경심이다. 아무리 군대가 강해도 전 사회적, 전 국민적 결속이나 각오가 없으면 전쟁할 수 없다. 게다가 김정은은 러시아 푸틴의 방북을 앞두고 있다. 푸틴은 동아시아에 러시아의 전쟁 동력을 분산하는 또 다른 전선이 조성되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특히 그 ‘전쟁’이 미국의 초토화 전력을 불러올 것이 뻔한 마당에 푸틴은 그런 일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친미 반중 노선을 택한 대만의 총선 결과는 북한 문제에 관한 중국의 시선과 여유를 앗아갔으며 김정은의 러시아 밀착이 달가울 리 없다. 김정은의 도발 우려를 트럼프의 재집권과 연관 짓는 시각도 있는데 트럼프는 김정은을 끌어들여 자기 손아귀에 넣는 것을 바라지 김정은의 전쟁 쇼에 들러리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 도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핵무기는 전쟁을 한 방으로 해결한다. 현대전에는 전선(戰線)이 없다. 미사일, 드론 그리고 거기에 얹혀진 핵탄두가 대세를 가른다. 막다른 골목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쓸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있다.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재로서 북한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핵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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