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에서 만난 제주도 나무 4가지 [김민철의 꽃이야기]

김민철 논설위원 2024. 1. 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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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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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대추 모양의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을 많이 보았다. 멀구슬나무인데, 우리나라 남해안과 제주도 민가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다. 이 나무를 보니 4·3사건을 다룬 현기영 중편소설 ‘순이삼촌’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서 같은 날 멀구슬나무에 돼지 잡는 이유

소설은 화자가 할아버지 제사에 맞추어 고향 제주에 내려갔다가 순이삼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순이삼촌은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낸 친척 아주머니였다. 제주도에서는 아저씨·아주머니를 구분하지 않고 촌수 따지기 어려운 친척 어른을 ‘삼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설은 이 소식을 계기로 순이삼촌을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겪은 4·3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멀구슬나무는 제주도에선 한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 나오는 곡소리.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멀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멀구슬나무. 대추 모양의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소설은 4.3사건 중에서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북촌사건’을 다루고 있다. 1949년 1월17일 제주 조천읍 북촌리에서 육지에서 온 군인 2명이 무장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흥분한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다음 소설에서처럼 50~60명 단위로 끌고가 총살한 사건이다. 이런 집단학살의 결과,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은 것이다.

이 학살이 있기 전에도 제주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은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고, 할 수 없이 한라산 굴속으로 숨기도 했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우선 멀구슬나무는 제주도와 남해안 민가 주변에 정말 많은 나무다. 어귀에 멀구슬나무가 없는 동네가 없다시피하고, 이 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동네도 있다. 굵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5~6월쯤 연한 보라색 조그만 꽃들이 화사하게 피는데, 꽃향기도 아주 좋다.

멀구슬나무 열매.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에서도 이 나무를 볼 수 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에서 노란색으로 그려진 나무가 멀구슬나무다. 이중섭은 6·25때 제주도로 피난을 와서 일 년 정도 서귀포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서울 등 중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나무가 남쪽지방에 왜 이렇게 많은지 궁금했다. 멀구슬나무는 성장이 빠르고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나 악기를 만들었다. 예로부터 딸을 낳으면 시집갈 때 장롱을 해주려고 오동나무를 심었는데, 남쪽에서는 오동나무 대신 멀구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순이삼촌’에서 비극을 드러내는 나무로 쓰인 것이다.

◇청미래덩굴, 태울 때 연기 나지 않아

‘도피자’들이 밥을 지을 때 연기를 내지 않기위해 쓴 청미래덩굴은 제주도만 아니라 전국 어느 숲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덩굴이다. 지역에 따라 망개나무, 맹감 혹은 명감나무라고 부른다. 청미래덩굴은 가을에 지름 1㎝ 정도 크기로 동그랗고 반들반들하게 익어 가는 빨간 열매가 인상적이다. 불을 지펴도 연기가 나지 않기로 유명한 나무로 싸리나무도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빨치산 정하섭이 찾아왔을 때 소화가 연기가 나지않도록 싸리나무로 불을 지피는 장면이 나온다.

청미래덩굴 열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밤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것을 막기위해 군경의 지도하에 마을 주변에 ‘성’을 쌓아야했다. ‘불탄 집터의 울담도 허물고 밭담도 허물어’ 돌을 져날랐다.

<남정들이 출정해버린 부락에 남은 건 노인과 아녀자들뿐이라 그 역사는 거의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전략촌을 두 바퀴 두르는 겹성이었다. 두 성 사이에는 실거리나무, 엄나무 따위 가시 많은 나무를 베어다 넣었다.>

실거리나무와 엄나무(음나무가 추천명)는 소설에 나오는대로 험한 가시가 많은 나무다. 이중 실거리나무는 멀구슬나무처럼 제주도와 남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난대성 나무다. 실거리나무는 이름부터 재미있는 나무다. 독특한 이름은 줄기와 가지에 가시가, 그것도 아래로 구부러진 험한 가시가 많아 옷의 실밥이 잘 걸리는 나무라는 뜻이다. 콩과 식물로, 잎은 아카시 잎을 닮았고 4~6월 피는 꽃은 노랑나비를 닮았다.

실거리나무. 줄기와 가지에 아래로 구부러진 가시가 있고 4~6월 노랑나비를 닮은 꽃이 핀다.

음나무는 두릅나무와 함께 봄에 새순을 나물로 먹는 나무다. 두릅나무 가시가 자잘한 반면 음나무 가시는 굵다. 잎 모양과 달리는 형태도 판이하다. 위압적으로 큰 가시와 오리발처럼 생긴 커다란 잎이 이 나무의 특징이다.

음나무. 엄나무라고도 부른다. 큰 가시와 오리발처럼 생긴 커다란 잎을 가졌다.

흔히 동백꽃이 4·3사건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4·3사건을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이 소설에선 멀구슬나무, 청미래덩굴, 실거리나무, 음나무 등 4가지 나무가 붉은 동백꽃보다 더 선명하게 희생자들의 한과 억울함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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