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영유’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정필재 2024. 1. 2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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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과거 영유에서 일한 외국인 강사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아이가 수업 중 욕설을 뱉는 걸 들었을 때 난감하다"며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타이르니 교육적으로도 좋은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친구들이 영유에 등록하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벌써부터 영유는 '가기 싫다'고 드러누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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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면서 내린 결정이다.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다. 정부가 보내라는 집 근처 유치원은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시설도 오래됐고 다른 곳에 비해 원생도 많았다. 정부의 두 번째 제안인 숲 유치원은 아이들이 뛰어놀기 충분할 만큼 넓은 데다가 주변 환경을 이용한 콘텐츠도 다양해 보였지만 10㎞나 떨어진 거리가 문제였다. 정부가 ‘영유’라는 표현을 막은 세 번째 곳은 새로 지어진 건물 속 깨끗한 시설을 자랑했다. 아이들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영어 표현이 담긴 에세이는 학원 벽 곳곳에 붙어 있었고, 원장은 커리큘럼에 자부심을 보이며 ‘유아 때가 아니면 못 고치는 것들이 있다’며 등록을 권유했다.
정필재 문화체육부 기자
마음이 흔들렸지만 영유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영어보다 중요한 것들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영어를 배우면서 받을 스트레스도 걱정이었다. 과거 영유에서 일한 외국인 강사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아이가 수업 중 욕설을 뱉는 걸 들었을 때 난감하다”며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타이르니 교육적으로도 좋은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영유를 안 보내는 게 좋겠다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아이의 친구들이 영유에 등록하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함께 영유에 보내자’는 설득에 언론보도를 살펴봤다. 10여년 전만 해도 영유는 ‘비싼 비용에 효과는 미지수인 곳’이었는데 이젠 ‘양극화를 부추기는 곳’이라는 기사가 가득했다. 아이에게 우선 영어를 접하게 해봤다. 토요일, 외국인이 진행하는 미술수업에 등록했다.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파이어 엔진, 레스큐 트럭’만 외칠 뿐 들어가기 싫다고 생떼를 부렸다. 같은 어린이집 친구를 꼬여 함께 수업을 보내 봤지만 소용없었다. 친구와 함께 교실로 들어간 아이는 5분을 버티지 못한 채 ‘이머전시’를 외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벌써부터 영유는 ‘가기 싫다’고 드러누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유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주변의 조언에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교포 같은 영어발음을 자랑하는 주변 ‘새 세대’는 비결을 영유로 꼽았다. 한화 이글스 투수 문동주는 외국인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건 “영유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했고, 아이를 영유에 보내지 않았던 선배들은 이를 후회하기도 했다. 문득 훗날 아이가 영어를 못해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영유에 가봤다. 아이들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의 표현으로 가득한 에세이를 보면서 ‘이제 우리 아이 차례인가’ 하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등록을 고민했다. 입학금 등 들어가는 비용을 빼면 매달 식비를 포함해 180만원이 필요했다. 첫째가 7살이 되는 2년 뒤 둘째도 같이 보내야 하는데 갑자기 교복도 그렇고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굳게 결심했다. 나라에서 보내라는 유치원에 보내기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을 뿐인데 올해로 다섯 해째를 사는 아이가 벌써 경쟁에서 뒤지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뿐이다.

정필재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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