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나의 분노가 널 부를 때
공허함 커지면 우울로 이어져
주변에 투사하려고 하지 않고
사유한다면 희망의 싹이 틀 것
우리는 공허를 무언가로 채우며 산다. 누군가는 권력욕으로, 누군가는 성취욕으로, 누군가는 돈에 대한 욕망으로, 누군가는 허영으로, 분노로, 우울로, 좌절로 공허를 채운다.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공허다. 공허보다는 차라리 분노, 우울, 좌절로 채워져야 ‘생명’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공허를 채웠던 것이 사라질 때 돌이키지 못하는 광기의 상태가 된다.
분노는 복수로 이어진다. 분노의 행동화(acting-out)이다. 서로에 대한 복수가 연쇄되면서 역설적으로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자’가 된다. 그들이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 없었다면 우울감, 자책, 무력감, 절망감에 빠졌을 것이고, 이것이 진짜 광기가 되었을 것이다. 미친 것 같은 행동들이 진짜로 미치는 것은 막아주는 방어기제가 됐다. 두 사람의 치킨게임이 결국 두 사람을 구원한 셈이다.
치킨게임에 빠져 있는 동안엔 자기 삶에 대해 통제권을 갖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분노하고 복수하면 감정적 긴장을 풀 수 있게 된다. 분노가 존재의 완충장치이자 안전판이 된다. 분노를 투사할 수 있는 외부 소스가 있는 한, 적어도 완벽한 공허는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분노는 늘 표적을 비껴간다. 온몸에 화가 가득 차 있어 어떻게든 뚫어내야 하는데 진짜 표적은 너무 강하거나 지나치게 모호하다. 분노를 더 안전한 대상으로 바꾸거나 전치해야 한다. 이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이벤트가 터지면 그쪽으로 모든 감정이 쏟아지게 된다. 화풀이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에이미와 대니는 서로에게 ‘정당하게’ 복수한다.
분노는 본능이 아니다. 사회적 모순이나 불의에 직면해 자기 통제력을 회복하려 할 때 발생하는 증상이 분노다. 문제는, 분노의 표출에 있지 않다, 투사에 있다, 대니와 에이미는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에게는 저항하지 않는다. 에이미는 자신의 감정과 능력을 착취하는 자본가에게 분노해야 했다. 자신을 기만하는 남편과 부모에게 분노할 수도 있었다. 대니도 인종과 계급에 대한 편견으로 자신과 같은 이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백인 부르주아에게 분노해야 했다.
에이미와 대니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너무 강하거나 감당하기 어렵다.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엉뚱한 표적을 향한다. 분노를 투사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는다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갈등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분노의 투사는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게 해준다. 분노를 엉뚱한 대상에게 투사한다는 것은 결국 진짜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분노는 불평등하고 부패한 성과사회의 부산물이다. 성공의 좌절은 피해의식과 분노로 돌아온다. 양극화는 더 극심해지고 미디어 투명사회는 타인의 성공과 부패, 부조리를 시시각각 중계한다. 혐오와 악플, 테러는 분노의 투사이자 행동화이다. 그리고 이 악하고 어리석은 방어기제로 ‘죄 없는 죄인’,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분노는 투사할 것이 아니다. 해석돼야 한다. 무엇에 분노하는지, 왜 분노하는지,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지, 이 분노를 어떤 가치를 위한 에너지로 쓸 것인지 사유해야 한다. 분노로 채워졌더라도, 그 분노를 사유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연대와 저항, 희망이 싹틀 수 있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은 우리 시대 증상학이다. 이 작품은 리얼리즘 드라마가 아니다. 알레고리다. 알레고리 드라마는 인물과 사건을 과장하고 희화화시킨다. 인과관계도 느슨하다. 그래서 세계의 진실을 더 잘 드러낸다. 시청자는 ‘안전하게’ 자신의 분노 또한 드라마에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드라마가 위험할 수도 있는 이유다. 우리는 이 알레고리 드라마를 즐기되 사유해야 한다. 대니와 에이미의 진정한 구원은 이들이 성공의 환상에 들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환상에 도취돼 있을 때 그들은 오히려 분노와 우울에 빠져 있었다. 그 환상에 환멸을 느꼈을 때 그들은 비로소 구원될 수 있었다. 희망은 환상이 아니라 환멸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 칼럼이다. 4년 전, 이 칼럼을 처음 시작할 때 ‘희망’을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칼럼 제목이 ‘멜랑콜리아’였던 이유도 잃은 것을 찾는 과정이 이 지면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망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바로 나의 곁. 희망은 언제나 곁에서 나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는 희망의 응시를 받고 있었다. 희망은, 희망의 응시를 감지하는 능력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간 칼럼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내가 있는 곳은 변방의 낮은 지점이다. 이곳에선 세계를 정확히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늘은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 그늘에 관해 쓰려 했다. 분노의 그늘에는 분노의 투사와 행동화로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이 있다.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희망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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