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마리 앙투아네트
파리 중심부 센강 변에 있는 중세 건물 콩시에르주리는 궁전으로 지었지만 14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쓰던 곳이다. 이곳을 거쳐 간 죄수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랑스 대혁명기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1755~1793)다. 그곳에 76일간 수감돼 있으면서 재판받고 단두대의 이슬이 됐다. 남편 루이 16세는 그해 초 이미 단두대에 올랐다.
▶18세기에 오스트리아를 40년간 다스린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존경받는 통치자였다. 국가 재정을 아끼기 위해 진흙에서 추출한 황색 도료로 황실 소유 건물을 칠하게 해 일반 국민도 이 ‘테레지아 노랑’을 따라 할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그는 유럽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전쟁 억제를 위해 결혼 동맹을 맺었다. 여제는 어린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면서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남들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1788년 프랑스 재정은 지출 6억2900만 리브르, 수입 5억300만 리브르의 적자 상태였다. 왕실 비용으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돼 전체 지출의 6% 수준이었다.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주범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전쟁 등을 치르며 남긴 막대한 부채였다. 부채 상환에 들어가는 금액이 전체 지출의 절반(3억리브르)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빈곤이 나라를 휩쓸자 ‘사치와 타락의 원흉’이라며 외국인 왕비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된 지 두 달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1차 심문이 열렸다. 기소장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돈을 주고 정치 거래를 했다. 내전을 부추기며 애국자를 학살하고 외국에 전쟁 작전을 넘겨주었다. 8세 아들을 잠자리로 불러들여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인쇄공, 가발 제조업자, 음악가, 목수 등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급진파 자크 에베르가 1790년부터 발간한 포퓰리즘 신문 ‘르 페르 뒤셴’이 “창녀” “암늑대”라고 부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근친상간 누명을 씌워 사형을 주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고 몇 달 후 에베르도 다른 급진파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왕족으로 누린 화려한 삶,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죽음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 소설, 뮤지컬 등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덧씌워진 잘못된 소문은 이후 역사적으로 상당 부분 해명됐지만 여전히 따라다닌다. 잊을 만하면 종종 국내 정치에도 소환되는데 최근에도 그 이름이 등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알고 인용하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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