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한 표 한 표가 소중하다면
2024년은 60여개국이 대선 또는 총선을 치르는 민주주의 사상 최대 선거의 해다. 발표 기관·매체에 따라 구체적 수치엔 차이가 있지만 인구 또는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의 절반 이상이 올해 선거의 영향을 받으며, 2048년까지 이에 필적할 해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할 대표자를 뽑는 선거는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선거를 치른다는 사실 자체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예컨대 러시아는 올해 3월에 대통령을 뽑지만,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고 이 선거에 의미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즉 민주주의는 절차와 형식도 지켜야 하지만 그 내용과 가치가 중요하다. 보통선거 혹은 평등선거처럼 법전에 써 있는 원칙이 아니라 그 원칙이 구현되는 실질을 봐야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를 애초부터 투표장에서 배제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민주주의가 온전할 리 없다.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의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의 민주화는 1965년에 이뤄졌다”고 단언한다. 대통령제의 원조, 한때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여겨진 나라에 대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역사와 맥락을 보면 수긍할 수 있다.
1863년 노예 해방 그리고 1868년 수정헌법 제14조에 따라, 흑인 노예들이 시민권자의 권리를 가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치적 힘이 따라온다. 백인들은 흑인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요건, 가령 납세 여부 혹은 읽고 쓰기 능력 등을 조건으로 하면 실제로 흑인의 투표를 막을 수 있었다. 미국의 민주화가 1965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유는 그해에 투표권법이 제정되어 소수인종 특히 남부의 흑인에 대한 투표권 억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투표를 어렵게 만드는 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본인 확인을 위한 신분증의 범위를 제한하면 투표를 어렵게 만들 수 있는데, 실제 위스콘신 주에서 주립대 학생증을 신분증으로 쓸 수 없도록 하자 투표를 못하게 된 대학생이 꽤 많았다는 분석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투표하지 않았다거나, 바뀐 주소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일방적으로 유권자 등록이 말소되어 투표권을 빼앗긴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미국 민주주의의 큰 결함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별도의 유권자 등록이 필요 없고, 주민등록 제도와 통일된 신분증이 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국의 모든 선거를 같은 방식으로 관할하는 한국과는 무관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투표권의 완전하고 실질적인 보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표적 문제가 장애인의 투표권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전부터 이슈가 되어 온 1층 투표소 설치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 자료를 찾아보면,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 보조가 실효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다거나, 점자형 선거공보를 단순한 페이지 수 기준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 측면에서 일반 선거공보와 같은 수준으로 만드는 문제, 선거공보나 투표용지에 그림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발달장애인의 실질적 참정권을 보장하는 문제 등 여러 이슈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많은 사항이 선거관리위원회의 지침이나 재량에 맡겨져 있어 장애인이 결국 투표를 포기하게 되는 사례도 적지 않고, 장애인 참정권에 관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되었지만 국회에서 실질적인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슬프기만 하다.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누구나 계단을 오를 수 있고, 누구나 복잡한 공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도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부여받았고, 당연히 이를 행사할 권리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감이 아닌 배려로만 보장되고 있는 장애인 참정권은 아직 반쪽입니다.” 김예지 의원의 이 지적은 무엇 하나 보태거나 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통렬하다.
본격적인 총선 국면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에서 인사를 하고, 어떻게든 연락처를 구해 메시지를 남기며, 유권자를 한 명이라도 만나고 자신을 알리려는 후보자들이 많다. 그들에게 “한 표 한 표가 소중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현역 의원이라면 누군가의 한 표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충분히 시간이 있었는데 해야 할 일을 안 하신 거라고, 정치 신인에 대해서는 혹시 국회에 가면 모두의 한 표를 위해 일할 것을 공약해 달라고. 정말 한 표가 소중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민주주의에서 누구의 표는 한 표이고 다른 누구의 표는 반 표이고 이런 게 아니라고 말이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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