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보지 못하는 화가와 미술관람자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가능할까. 시각장애인이 미술을 감상하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미술관에도 점자로 된 안내문 등이 제공되며 시각장애인의 전시 접근권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시각적 자극의 덩어리인 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남는다. ‘보는 사람’으로서는 경험과 상상 밖의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는 그에 대한 훌륭한 답을 내놓는다.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인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전시를 관람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라토리가 가와우치의 왼쪽 팔꿈치에 살짝 손을 얹고 길을 따라가면 가와우치는 그림에 대해 보이는 정보를 두서없이 설명한다. 피에르 보나르의 ‘강아지와 여자’라는 그림에 대해 “한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앉아 있는데, 강아지의 뒤통수를 유독 자세히 보네요. 개한테 이가 있는지 보는 건가”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다른 친구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은데. 눈이 초점을 잃은 느낌”이라고 말하자, 여성은 슬퍼하며 고개를 숙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참 그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엔 “느긋하게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10210600001
가와우치는 시라토리와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눈의 해상도”를 높인다고 말한다. “나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주면서 안전하게 걷도록 해주는 장치. 시라토리씨는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주는 장치. 서로 몸의 기능을 확장하면서 연결되는 것도 그날의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전맹인 화가 마누엘 솔라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한다. 26세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솔라노는 절망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 솔라노는 사진과 같이 생생한 기억을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그려나간다.
솔라노 역시 타인에게 의지해 “몸의 기능을 확장하고 연결”하면서 그림을 완성한다. 팀원들과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캔버스에 윤곽선을 세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됐는지를 확인한다. 솔라노가 보는 것이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이라면, 팀원들은 솔라노의 기억이 캔버스에 재현되는 모습을 본다. 솔라노가 기억을 자신이 볼 수 없는 캔버스에 옮길 때, 팀원들은 볼 수 없는 솔라노의 기억 속을 탐험한다. 기묘하고도 놀라운 삼투압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https://www.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2401081838001
시라토리와 솔라노는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깨며 ‘모두를 위한 예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신년을 맞아 중기 운영계획을 발표하며 ‘무장애 미술관, 모두의 미술관 실행’을 제시했다.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를 연내 도입해 점자 입출력 장치, 수어동작 인식 기술 등을 탑재하겠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기술과 자동화를 통해 장애인 전시 관람의 편의를 도모하겠다는 것인데, 너무 손쉬운 답안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좋은 키오스크·앱이 만들어져도 기계 사용에 친숙지 않은 이들은 또 다른 배제와 불편을 경험할 것이다.
그보다는 ‘모두의 미술관’이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그려본다면 어떨까. 시라토리와 솔라노는 그 가능성의 단초를 제공한다. 시라토리의 감상법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만든 ‘대화형 미술 감상법’과 유사하기도 하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함께 예술을 향유하는 법을 찾는, 새로운 감각의 확장을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미술관을 꿈꾼다면, 너무 큰 꿈인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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