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지하철 타고 떠나는 연천 한탄강 트레킹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4. 1. 22. 19:36
1호선 전철 지난달 연천역까지 연장/좌상바위·재인폭포·백의리층 등 한탄강 트레킹 코스마다 절경 가득
‘재인폭포에서 [ ]에게 푹빠짐’.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푹 빠진다는 것은 마냥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고 일상에 지친 영혼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쉬게 해주니까. 한반도 인류가 시작된 땅 연천. 머리를 비우고 새해를 설계하기 좋은 한탄강 따라 느리게 걷다 만난 재인폭포 앞 포토존 [ ]안에 섰다. 올해도 하고 싶은 것에 푹 빠져 보길 소원하며.
◆지하철 타고 가볍게 떠나는 연천 여행
어제 눈이 좀 내려서인지 날이 참 맑고 투명하다. 자유로를 달리는 승용차 창문 밖으로 저 멀리 북한땅 개성 송악산의 웅장한 산자락까지 보일 정도이니. 당동IC에서 37번 국도 율곡로로 접어들어 30분을 달리자 등장하는 어유터널. 어딘가 익숙한 이름은 옛 추억으로 잡아 이끈다. 그래 맞다 어유지리. 군복무 시절을 보낸 마을인데 근처인가 보다. 경기 연천군과 파주시를 넘나들며 군 복무하던 힘든 때를 떠올리며 한참을 상념에 잠긴다. 장대한 임진강 주상절리가 펼쳐지는 동이대교를 지나 20여분을 더 달려 청산면으로 들어서자 좌상바위 이정표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때 눈길을 사로잡는 마을 길 곳곳에 걸린 현수막. 전곡역과 연천역 개통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지난달 16일부터 소요산역이 종점이던 1호선 전철이 연장돼 전곡역을 지나 연천역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놀랍다. 군 생활을 한 곳이라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이곳을 전철로 서울 도심에서 한 번에 올 수 있다니. 종각역에서 출발해 1시간반이면 전곡역에 닿고 좌상바위까지는 9㎞에 불과하다. 차로 15분 걸리고 왕복 택시비 3만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한탄강의 멋진 절경을 즐길 수 있어 앞으로 연천 여행이 크게 활성화될 것 같다.
‘빵공장’ 간판이 커다랗게 걸린 청산면 베이커리 맛집 라피유에서 빵과 커피를 사 들고 좌상바위를 시작으로 한탄강 유람길에 오른다. 모두 5개 트레킹 코스로 1코스(2.03㎞·30분) 좌상바위∼백사장∼합수머리 전경∼아우라지 베개용암∼신답리 고분∼삼형제바위, 2코스(1.30㎞·20분) 장군바위·삼형제바위∼비녀바위·사모바위, 3코스(1.35㎞·20분) 억새군락지∼옥녀폭포·백의리층∼소수력발전소, 4코스(2.64㎞·40분) 소수력발전소∼불탄소∼한여울교∼친환경캠핑장∼한탄강댐, 5코스(2.23㎞·40분) 한탄강댐∼합수머리 전경∼재인폭포로 다양하다.
◆아버지 닮은 든든한 좌상바위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궁신교 서쪽으로 좌상바위 가는 길이 보인다. 여름이면 카약을 타는 이들로 북적거리는 곳인데, 강이 얼고 눈까지 덮인 겨울의 좌상바위는 고요하다. 덕분에 오로지 자연과 호흡하며 걷기 좋다. 한탄강 주변에서 발견된 다양한 암석으로 꾸민 오솔길을 끝에 서면 60m 높이로 우뚝 선 거대한 절벽, 좌상바위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밥공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바위는 든든하면서도 넉넉한 아버지 품을 닮았다. 실제 좌상바위는 ‘청산면 궁평리 마을 좌측에 있는 커다란 형상’이란 뜻으로, 청산면 일대를 오랫동안 수호한 장승과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자갈로 이뤄진 강변을 따라 돌탑들이 즐비하다. 작은 돌 위에 몇배나 큰 돌을 어찌 저리 균형을 잘 잡아 쌓았을까. 솜씨 좋은 이들이 다녀갔나 보다.
연천 지역에 6500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후기에 격렬한 화산분출이 있었고 그때 만들어진 현무암 덩어리가 좌상바위다. 지명을 따서 장탄리 현무암으로도 불린다. 화산의 화구나 화도 주변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으로 바위에 곳곳에 새겨진 세로줄 무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과 바람이 오랜 시간 바위를 캔버스 삼아 이런 멋진 그림을 그려 놓았다. 겨울이라 나뭇가지만 앙상해 절벽에 아로새겨진 줄무늬가 더욱 또렷하다. 표면에 작은 점들도 보이는데 붓으로 하얀 물감을 툭툭 찍어 놓은 것 같다. 화산이 분출할 때 공기와 가스가 빠져나간 구멍을 암석 안쪽에 있던 칼슘성분이 밀고 나오면서 메운 흔적이다. 마치 살구 속씨인 흰색 알맹이와 비슷해 ‘행인상’ 구조라 부른다. 또 변성암, 화강암, 응회암, 각력암, 편마암 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암석교과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과거에 하천이 흐른 흔적을 보여주는 하안단구층이 좌상바위 초입부에 있어 지형학적 특징도 관찰할 수 있다.
◆눈 덮인 재인폭포에 흐르는 장쾌한 물줄기
연천은 한반도 인류가 시작된 곳이다. 1978년 전곡리유적에서 발굴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이들 뒷받침한다. 이는 석기의 양면을 가공해 다듬어 찍고 자르는 기능을 모두 갖춘 정교한 주먹도끼로 인류는 50만∼70만년 전 이를 사용했다. 이에 인도를 경계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유럽 및 아프리카 지역과 단순한 형태인 ‘찍개’를 사용한 동아시아지역으로 나눈 미국 고고학자 H. 모비우스 교수의 ‘구석기 이원론’이 오랫동안 지배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인류의 조상이 열등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연천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그의 이론은 휴지조각이 됐고 세계 구석기 지도는 바뀌었다.
한반도 문명의 발상지 연천은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지질이 관찰돼 포천, 철원과 함께 2015년 국가지질공원에 이어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한탄강을 따라 재인폭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양한 걸작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한탄강과 영평천이 어우러지는 곳에 생성된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주상절리 절벽과 베개용암이 어우러진 독특한 지형을 선사한다. 절벽 아래 둥근 베개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한탄강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던 용암이 영평천의 차가운 물을 만나 급격하게 식으면서 이런 독특한 형상을 만들었다. 베개용암은 보통 깊은 바다에서 용암이 분출할 때 생성되는데, 이곳은 내륙 강가에서 만들어진 베개용암이라 희귀성이 높다.
재연폭포 오토캠핑장 입구 한탄강 유역에는 백의리층(미고결 퇴적층)이 자리 잡고 있다. 20~30m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 아래 아직 암석화되지 않은 퇴적층을 백의리층이라 부른다. 옛 한탄강 하천바닥에 쌓였던 퇴적층으로 용암이 흐르기 전 이곳이 한탄강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특히 자갈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돼 옛 한탄강이 흐르던 물의 방향도 알려준다.
이제 연천의 걸작 재인폭포를 만날 시간. 정말 심하게 흔들리는 출렁다리에 서자 한탄강이 빚은 절경, 재인폭포가 눈앞에 아찔하게 펼쳐진다. 거대한 폭포를 따라 장쾌한 물줄기가 에메랄드빛 깊은 포트홀로 쏟아져 내리는 풍경은 입을 다물 수 없는 장관이다.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폭포는 끊임없이 폭포 아래를 깎아 너비 30m, 수심 5m에 달하는 포트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동굴처럼 파인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까지 어우러져 마치 신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은 듯한 착각을 부른다. 줄을 타던 재인(才人)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금실 좋은 광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원님이 남편에게 폭포에서 줄을 타라는 명령을 내렸고, 원님이 몰래 줄을 끊어 버려 남편은 폭포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아내는 원님의 수청을 들게 될 위기에 처하자 원님의 코를 문 뒤 자결하고 만다. 이에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코문리’로 부르다 지금의 고문리가 됐단다.
재인폭포는 현재도 지형이 바뀌고 있다. 폭포는 한탄강 지류로 흘러든 용암지대가 서서히 움푹하게 내려앉으면서 만들어졌는데, 두부침식(역행침식)으로 현무암이 계속 깎이면서 최초 생성 위치에서 상류 쪽으로 무려 350m를 파고 들어갔다. 재인폭포 입구 전망대에선 이렇게 만들어진 기다란 협곡이 잘 보인다. 재인폭포 위쪽 산책로를 걷다 보면 폭포로 떨어지기 직전 맑은 물이 모이는 선녀탕도 만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곳까지 폭포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포토존 ‘재인폭포에서 [ ]에게 푹빠짐’ 앞에는 줄이 길다. 누구든 [ ] 안에 서면 그 사람에 빠지게 되니 재치 발랄한 아이디어다. 돌아나가는 길에 다양한 지질시대에 만들어진 암석으로 꾸민 암석공원도 들러보길. 암석이 지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단서임을 인간의 지문에 비유한 암석 상징존을 시작으로 연천에서 발굴한 선캄브리아시대에서 신생대까지의 암석 37개를 지문처럼 배치했다. 가장 안쪽 0번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 응회암. 억겁의 세월이 담긴 돌멩이 앞에 서니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연천=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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