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보조 판사가 재판지연 해소 가능” 퇴임하는 ‘법원 디지털 선구자’ 강민구 판사

허욱 기자 2024. 1. 2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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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내 ‘디지털 선구자’로 꼽히는 강민구(65·사법연수원 14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오는 30일 정년 퇴임한다. 그는 36년 판사 생활 동안 1만 201건의 판결문을 남겼다. 휴일을 제외하면 하루에 1건 꼴이다. 흔치 않은 기록이라고 한다.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박상훈 기자

강 부장판사는 22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그 비결은 디지털 기술 활용”이라며 “판결문 작성할 때 기술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많은 판결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밤새워 사건 기록을 보고 쟁점 정리하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PC용 프로그램을 사용해 3~4일 이상 걸리는 손해액 계산을 20분 만에 끝냈더니 사건 처리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고 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강 부장판사는 1988년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이후 대법원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대전고법·서울고법 부장판사, 창원지법원장, 부산지법원장, 법원도서관장 등을 지냈다.

◇ “AI 판결문 작성 도우미 속히 개발해야”

강 부장판사는 인공지능(AI) 기술 활용이 재판 지연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대법원은 차세대 정보화 시스템 개통을 앞두고 재판 업무에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판사에게 유사 사건들의 판결문을 추천하고, 내용을 분석해 쟁점과 결론을 알려주는 기법이다. 판사들의 업무 부담을 경감시키고, 일처리 속도도 향상된다는 전망이 나온다.

강 부장판사는 더 나아가 판사 업무를 보조하는 ‘판결문 작성 AI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건의 결론은 당연히 판사가 내리더라도 판결 이유 작성을 보조할 AI를 하루 속히 개발해 판사들에게 보급해야 한다”며 “이렇게만 된다면 판사 1명당 재판연구원 3명 이상을 붙여준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초임 판사 시절부터 판결문 전면 공개를 주장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판결문이 실시간으로 노출되면 판결을 한 판사는 물론 소송을 맡은 변호사의 실력도 공개되지 않겠느냐”며 “판결문 전면 공개의 혜택은 결국 대다수의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특히 AI 시대에는 판결문의 전면적인 공개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AI가 자동차라면 공개 판결문은 좋은 연료라고 생각하면 된다. AI에게 제대로 된 학습을 시켜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 “육사 교수 시절 컴퓨터에 눈 떠”…김용담 대법관의 특급 포옹도 기억나

강 부장판사는 법복을 입기 전부터 IT 기술의 신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85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의 눈앞에 나타난 장비는 중대형 서버용 컴퓨터에 연결된 흑백 화면의 모니터였다. 정보 처리 기능은 없고 입출력만 하는 단순한 단말기에 불과했지만, 그 시절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비였다. 그는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 봤는데 너무나도 충격이었고, 법조인의 미래도 컴퓨터에 있다고 확신했다”고 했다.

이후 육사 교수 생활 3년간 컴퓨터 프로그램 전반을 독학으로 익힌 그는 판사로 임관하자마자 컴퓨터를 자비로 구매해 재판 업무에 투입했다. 정부가 판사에게 사무용 컴퓨터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그는 1997년부터 2년간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판사 업무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마우스로 판결문 내용을 복사하고 붙여 넣을 수 있게 시스템을 바꿔 놨더니 김용담 대법관(당시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당신이 우리 재판연구관들 목숨을 살렸다’며 저를 안아줬었다”고 말했다. 그 때만 해도 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할 때 앞서 나온 판결의 논리를 인용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손으로 타이핑을 해야만 했다. 당시 재판연구관이던 이광범(13기) LKB 대표변호사와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형으로 알려진 송영천(13기) 변호사도 “강 판사 덕분에 업무 효율이 올라갔다”고 말하며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박상훈 기자

◇ “중국 법원에 IT 기술 역전 당해 아쉬워”

강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이던 2016년 사법정보화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 시절 사법부의 차세대 정보화 시스템 마련에 필요한 기술 사양을 대부분 확정하면서 올해 개통 예정인 시스템의 주춧돌을 놓기도 했다.

그는 그해 11월 중국의 인민법원 견학을 통해 대한민국이 중국에 사법 정보화 수준을 추월당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 중국은 10년 넘게 한국 법원을 벤치마킹하겠다며 찾아왔던 나라였다. 중국 인민법원은 우리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해 사용하고 있더라. 그런데 중국 법원은 이미 재판 당사자의 발언을 속기사도 없이 법정에서 자동 기록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귀국한 강 부장판사는 중국 사법부의 기술 발전 속도를 대법원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양 대법원장은 ‘역추월’ 계획을 수립했지만, ‘사법 행정권 남용’ 사건이 불거지며 계획은 중단됐다고 한다.

◇ “성과와 보상 체계 무너진 6년” 재판 지연 심화 돼

강 부장판사는 사법부의 ‘재판 지연’ 현상에 대해서는 법원 내 ‘성과와 보상’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등 ‘판사가 열심히 일할 동기’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조직이든 공정한 평가와 인사, 능력에 맞는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조직 운영의 기본”이라며 “그 체계가 지난 6년 간 허물어졌다”고 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작년 전국 법원에서 민사 합의 사건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평균 14개월이 걸렸다. 2019년 9.9개월, 2020년 10.3개월, 2021년 12.1개월로 계속해서 기간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 부장판사는 “법률로 없앤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를 현 시점에서 다시 부활시키기는 힘들겠지만, 법관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줄만한 요소는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격무에 시달리는 등 희생이 요구되는 고법 판사 제도 역시 하루 빨리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 “구로공단 농지사건 선고하자 5분간 박수 못잊어”

강 부장판사는 언론 전담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13부 재판장 시절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의 성추행 의혹 제기 사건에서 직원에 대한 손해배상액을 1심보다 높이고, 호소문을 그대로 기사화 한 기자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당시 강 부장판사는 “다양한 가치와 의견이 대립하는 갈등 상황에서도 입장을 달리하는 상대방의 명예와 인격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이를 훼손하는 허위사실 적시와 언론을 통한 유포는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지 않아야 한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강 부장판사는 ‘삼례 3인조’ 강도치사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낸 소송의 2심을 맡아 국가와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검사의 배상책임을 재차 인정하기도 했다.

강 부장판사는 법관 생활 36년 간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구로공단 농민 토지수용 손실보상금’ 사건을 언급했다. 이 사건은 강 부장판사가 서울고법 민사9부 재판장 시절 창원지방법원장 발령을 이틀 앞두고 선고했다. 그의 판결로 ‘구로공단 농지사건’ 피해자 농민과 유족들 수백명은 사건 발생 47년 만에 승소했다. 강 부장판사는 단일 국가배상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인 1137억원을 정부가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는 “법원장 인사 발령을 1년 앞두고 맡았는데, 내가 반드시 선고하고 떠나겠다고 마음 먹었던 사건”이라며 “선고가 끝나자 법정에서 5분간 박수가 이어졌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오랜 기간 ‘디지털 선구자’로 알려지는 바람에 ‘정통 법관’의 면모가 가려진 게 못내 아쉽다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둘 중 하나 고르라면 ‘정통 법관’이란 칭호를 고르고 싶다. 하지만 국민이 ‘디지털 선구자’를 원한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겠나”라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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