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나왔을 때처럼 아무도 없이 떠나서야 되겠어요?”
“시설에서 탈출해 나오니 아무도 없었죠. 세상 떠날 때도 그래서야 되겠어요?”
1950~1970년대 부산 최대 부랑아 집단수용시설이었던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손석주(62) 대표는 23일 오전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반빈곤센터(대표 최고운) 사무실에서 ‘공영장례 나눔의 시간’을 보낸다. 이 자리에서 손 대표를 비롯한 6명의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들은 “사망할 경우 사후 처리와 장례절차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에 일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장과 유언장을 쓴다. 사단법인 두루 소속으로 부산에서 공익변호사 활동을 하는 이주언 변호사가 유언장이 민법상 효력을 갖추도록 자문을 해준다. 전상규 사진작가가 촬영한 6명의 영정사진 전달식도 진행한다.
공영장례란 무연고자 및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장례를 일컫는다. 지난해 12월 부산시가 “사망 전 유언 방식으로 지정한 특정 관계자도 장례의식을 주관할 수 있도록 공영장례 조례를 개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손석주 대표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본인을 포함해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의 30%가 무연고자이기 때문이다. 손 대표가 막내일 정도로 대부분 60대 중반 이상의 고령이라 그 무엇보다 시급한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부산 시민단체인 반빈곤센터의 도움도 받게 됐다. 행사를 앞두고 한껏 고무된 손석주 대표를 지난 19일 전화로 만났다.
1951~76년 부산 부랑아 집단수용시설
6평 ‘감방’서 30~40명 생활…매일 폭행
피해자 중 30%는 무연고자로 추정
영정사진 하나 없는 장례식…‘공영장례’ 추진
손 대표는 9살과 11살이던 1971년과 1973년, 두 차례나 재생원에 납치됐고 두 번 모두 탈출했다. 처음엔 두 달, 두 번째는 11개월간 있었다. 6평 남짓한 감방 같은 곳에서 30~40명이 생활했다. 허기에 시달리며 맞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던 악마의 소굴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뒤엔 잊으려고 노력해왔다. 2022년 10월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다 갑자기 억울해서 견딜 수 없어졌다. ‘우리는 왜 아무도 몰라주나.’ 무작정 경남 양산시청 기자실을 찾아갔다. 그를 만난 국제신문이 영화숙·재생원을 집중 보도하며 조명했고, 이후 피해생존자협의회를 결성해 대표를 맡았다.
손 대표는 지난해 3월 영화숙·재생원을 거쳐 부산 소년의 집에 수용됐던 한 피해자의 장례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살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소년의 집 출신 동료들이 장례를 치러줬어요. 빈소에 고인의 사진이 없다는 게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비참한 게 뭔지 아세요? 시신을 거둘 가족이 없으면 냉동창고에 서너 달 있다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화장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길에 잘 가라는 인사는 해드려야죠.”
부산시에서 지원하는 1인당 공영장례 비용은 80만원이다. 이 돈으로는 빈소에 단을 세우고 화장장을 하고 나면 끝이다. 조문객 맞이와 장례 비용 등은 피해자생존자협의회가 인권단체 등과 의논해 방법을 찾아 고인이 외롭지 않게 떠나도록 지원하려고 한다.
재단법인 영화숙이 운영한 영화숙·재생원은, 부산 형제복지원 박인근 회장이 모델로 삼았던 수용시설이다. 1951년 설립된 뒤 원장 이순영의 구속으로 1976년 1월 문을 닫을 때까지 폭행·감금·강제노역·성폭행·사망 등을 당한 피해자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멀쩡한 가족이 있는데도 잡혀 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탈출하거나 풀려난 뒤 가족을 못 찾아 평생을 무연고자로 사는 이가 많다. 뒤늦게 가족을 이뤘지만 관계가 파탄 난 경우도 적지 않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는 7명뿐이었으나,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8월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직권조사를 의결한 뒤 현재 신청인에 구애받지 않고 피해자 조사를 진행 중이다.
손 대표는 피해생존자들의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피해자 확인)까지 염두에 두고 유언장을 쓸 예정이다. “진실규명이 되면 법원에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잖아요. 법적 검토가 필요하지만, 중도에 사망할 경우 배상금을 받아 사회에 기부할 수 있도록 처리해달라는 말도 유언에 포함하려고 합니다. 저부터 그렇게 쓸 겁니다.”
이번 공영장례 유언장 작성자는 6명에 불과하지만 곧 7~8명이 더 참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들도 유언장 쓰기 전에 영정사진부터 찍어둘 예정이다. 현재 피해생존자협의회 회원이 67명인데 이 중 30명 정도의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손 대표는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의 피해생존자들과도 만나 공영장례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집단수용시설에 갇혀 일찍이 사회와 고립됐던 피해자들은 평생 고립돼 지낸 경우가 많다. 공영장례의 필요성에 관한 한 이심전심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손 대표의 꿈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영화숙·재생원 피해사망자를 위한 첫 위령제였다. 여러 인권단체 도움으로 지난해 10월28일 꿈을 이뤘다. 두 번째 꿈은 공영장례였다. 이 꿈도 이루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꿈은 진실화해위의 신속한 진실규명이다. “피해생존자 대부분 병약자, 노약자입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이른 시간에 안정된 삶을 찾도록 결정이 빨리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법부의 판단도 앞당겨지잖아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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