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와타나베 부인의 변심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겪어내는 동안, '아시아 최고의 부자 나라'라는 찬란했던 그 위상은 빛바래고 낡아버렸다. 수십년 간의 제로 금리와 이후에 이어진 마이너스 금리에도 일본 경기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의 주식시장 또한 인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갑진년(甲辰年) 새해는 명실상부 일본 주식시장의 해가 될 것 같다. 올 들어 일본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 평균주가(닛케이225)는 3만5000을 훌쩍 넘으며 연일 사상 최고점을 찍고 있다. 이웃인 중극과 한국 증시가 죽을 쑤는 동안에도 '버블 경제' 시대 이후 최고의 호황을 맞은 일본 증시는 오늘도 장중에 3만6500을 넘었다.
닛케이는 올해에만 10% 가까이 올랐는데 미국 S&P500은 2.0% 오르는 데 그쳤다. 코스피의 사정은 더 하다. 이 기간 코스피는 7% 넘게 밀렸다. 그래도 홍콩 항셍지수보다는 낫다. 항셍지수는 11% 내렸다. 이제 사람들은 닛케이지수가 1989년 12월의 사상 최고치(3만8195)를 넘어설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시장에선 이미 4만을 점치고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일본 증시의 호황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 증시 상승의 배경에는 먼저 엔화 약세가 있다. 주지하듯 미국과 한국 등 주요국이 '역대급' 금리 인상으로 고금리를 유지 하는 중에도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저환율에 외국인도 일본 증시에 투자할 유인이 생겼고, 일본 상장기업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출기업은 '엔저'로 실적이 개선됐다. 일본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최근 어닝시즌에서 세전 이익 기준 시장예상을 상회한 회사들이 70%에 달했던 반면, 삼성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대기업들은 올 초 '쇼크'에 가까운 지난해 실적을 발표하며 증시를 더욱 끌어내린 바 있다.
또 일본 증시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정부의 소액주주 유인책으로 '와타나베(渡邊) 부인'의 '단스(장롱) 예금'이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 부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일본 투자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과거 수익을 좇아 국경을 넘나들던 일본 투자자들은 버블 경제의 쓴맛을 본 이후 현금에 집착하게 됐다. 버블 붕괴 이후 30년이 지난 현재도 일본의 가계는 2100조엔(약 1경9000조원) 수준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현금 또는 현금성 예금이다. 와타나베 부인은 독일과 인도의 연간 GDP(국내총생산)를 합친 것과 맞먹고, 시가총액 세계 1위인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사우디 아람코를 모두 인수할 수 있는 돈을 이자도 나오지 않는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 현금을 투자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올해 1월부터 '신(新)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시행중이다. NISA 도입 10년을 맞아 일본은 개인의 주식 투자에 대해 비과세 한도를 대폭 상향 변경했다. 또한 연간 납입한도는 120만엔에서 360만엔으로, 누적 납입한도는 600만엔에서 1800만엔으로 각각 상향 조정했다. 만 18세 이상 일본 거주자이면 누구나 평생 면세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다.
미국 자산운용사 오크트리캐피털의 창업자인 하워드 마크는 "일본의 많은 가계 자산이 은행에 잠들어 있다"며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강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일본 각 증권사의 연간 NISA 계좌 매입액은 2조엔대 후반이다. 이에 신 NISA의 투자 한도 증가로 연간 5조~6조엔 규모의 자금 유입이 기대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일본처럼 연초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와 ISA 혜택 확대 등을 통해 국내 주식시장 활성화 지원에 나섰다. 애초에 영국의 개인저축계좌(ISA)을 본떠 만든 것이 일본의 NISA이고, NISA를 보고 만든 것이 우리의 ISA였다.
얼마 전 윤석열 정부는 상속세 완화가 주식 시장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주주의 상속세 부담이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하는 과도한 세제라면서, 대주주 세금을 줄이고 가업승계가 매끄럽게 이뤄지면 결국 서민과 중산층 등 모든 주식 투자자에게 득이 된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물적·인적 분할과 자회사 문어발 상장, 오너가문 승계를 위한 주가 하락 유도 등 대주주들의 전횡으로 피해를 본 기억이 또렷한 개미들에게 이게 통할 말 같지는 않다.
일본 증시를 부양하는 데 성공한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은 퇴진이 언급될 정도로 하락했다. 어쩌면 일본 자본시장과 정치가 그만큼 분리돼 있고, 때문에 그만큼 일관적인 정책이 가능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갑자기 ISA 분리과세 제도 변경으로 건강보험료 폭탄을 던져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대통령은 정치가이기 이전에 행정 수반이다. 지지율과 4월 총선을 빼고 소액주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펴 볼 순 없을까 안타까움이 커진다. st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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