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하버드대 최단기 총장 클로딘 게이 | 反유대주의·논문 표절 논란…첫 흑인 총장 6개월 만의 사임

김우영 기자 2024. 1. 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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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딘 게이 미국 하버드대 총장이 2023년 12월 5일 미 하원 교육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미국 하버드대 캠퍼스 전경. 사진 로이터연합

“제가 사임하는 게 학교를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미국 명문 하버드대의 클로딘 게이 총장이 1월 2일(이하 현지시각)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23년 7월 취임한 지 불과 6개월 만이다. 미국 뉴욕의 아이티 이민자 가정 출신인 그는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총장이자 두 번째 여성 총장이었다. 다만 이번 사임으로 1636년 하버드대 개교 이래 최단기간 재임 총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교내 반(反)유대주의 운동에 미온적으로 반응해 논란에 휩싸였던 게이 총장은 최근 논문 표절 의혹으로 사퇴 압박이 거세지자 끝내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현지 언론에선 기부금 의존도가 높은 미국 사립대학들이 유대계 자본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유탄 맞은 하버드대

발단은 2023년 10월 7일에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민간인 피해가 커지자, 미국 사회 곳곳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반유대주의 운동이 불거진 것이다. 대학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버드대 학생 단체 34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선 이스라엘 출신 학생이 캠퍼스에서 폭행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대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학들이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배경이다.

결국 미 하원은 2023년 12월 5일 아이비리그 대학 내 유대인 혐오 여론 관련 청문회를 열고, 하버드대·펜실베이니아대·MIT 총장을 증인으로 불러모았다. 그런데 “반유대 시위가 하버드대 행동 강령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느냐”는 공화당 엘리스 스터파닉 의원 질문에 게이 총장이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버드대는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다” 등 다소 모호한 답변을 내놓으면서 문제가 됐다. 즉답은 피했으나 유대계 세력을 중심으로 게이 총장의 발언이 반유대주의를 사실상 용인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일부 유대계 고액 기부자들은 기부 철회 의사를 밝히며 그의 사퇴를 촉구했다.

하버드대 구성원은 게이 총장을 두둔했다. 하버드대 교수와 교직원 수백 명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치적인 압박”이라며 그를 지지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게이 총장은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을 통해 사과하며 바짝 고개를 숙였다. 하버드대 이사회도 유임 방침을 밝히면서 그는 간신히 위기를 넘기는 듯했다.

하지만 게이 총장을 향한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보수 성향의 온라인 저널인 워싱턴 프리 비콘에 그의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됐다. 게이 총장의 1997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적절한 인용 표시가 없는 표현이 두 군데 발견된 것이다. 하버드대는 “논문이 곧 수정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거센 압박을 못 이긴 게이 총장이 끝내 스스로 물러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학생과 교직원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증오에 맞서고 학문적 엄정성을 지키겠다는 나의 약속을 의심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고 심경을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게이 총장의 표절 논란이 문제가 됐지만, 실제로는 기부금 감소에 대한 압박으로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버드대는 운영 예산의 30% 이상을 기부금 펀드 수익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학 총장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로 기부금 확보가 꼽힌다. 이에 게이 총장이 상당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란 분석이다.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 사진 로이터연합

미국 명문대도 벌벌 떤 ‘유대계 큰손’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해 현지 언론은 게이 총장 사임 사태의 배후로 유대계 ‘헤지펀드 큰손’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을 꼽고 있다. 1966년생인 그는 하버드대 사회학과 및 같은 대학 MBA 출신이다. 2004년 퍼싱스퀘어캐피털을 설립했는데, 2012년 글로벌 건강 보조 식품 업체 허벌라이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매도를 벌여 명성을 얻었다. 2015년 5월 경제지 ‘포브스’는 그를 표지 모델로 쓰며 ‘베이비 버핏’이라고 불렀다.

애크먼은 한국 전자상거래 업체 쿠팡의 초기 투자자로도 알려졌다. 2017년에는 하버드대에 쿠팡의 비상장 주식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당시 주식 가치가 약 1000만달러(약 132억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모교에 거액을 기부하며 상당한 입김을 행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반유대주의 운동에 적극 대응해 왔다. 일례로 하버드대 학생 단체들이 팔레스타인 지지 성명을 발표하자, 이들을 ‘취업 블랙리스트’에 올려 월가 취업을 막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성명을 발표했던 하버드대 학생 단체 34개 중 4개가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했다. 하버드대 서남아시아 학생 모임은 “이스라엘 규탄 성명에 동참한 사실에 대해 공식 사과한다”며 “테러 조직 하마스의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한다”는 성명까지 내놨다. 하지만 애크먼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칼끝을 총장에게 돌렸다. 게이 총장의 청문회 발언을 문제 삼아 하버드대 이사회에 그의 해임을 촉구하는 편지도 보냈다. 게이 총장이 신속하게 하마스의 테러 행위를 규탄하지 않아 대학가에 유대인 혐오 물결이 확산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게이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을 공론화한 것도 애크먼이었다. 게이 총장 사임 이후 미국의 저명 인권 운동가인 앨 샤프턴 목사는 “유리 천장을 깨려는 흑인 여성에 대한 공격”이라며 그를 비판했다.

한편 하버드대는 임시 총장으로 백인 남성인 앨런 가버 교무처장을 임명했다. 그는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하마스 테러에 대한 하버드대의 비판 수위가 높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인물이다.

Plus Point
아이비리그 女 총장 두 명 사임, MIT 콘블루스 총장은 ‘침묵’

엘리자베스 매길(왼쪽) 펜실베이니아대 총장과 샐리 콘블루스 MIT 총장. 사진 AP연합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싼 반유대주의 논란 탓에 게이 총장에 앞서 총장직에서 물러난 인물이 또 있다. 엘리자베스 매길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이다. 게이 총장과 마찬가지로 2023년 12월 5일 미 하원 청문회에 불려 갔던 그 역시 반유대주의 논란과 관련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다가 유대계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당시 발언으로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인 스톤리지자산운용의 로스 스티븐스 최고경영자(CEO)는 1억달러(약 1315억원)의 기부금을 철회하겠다고 밝혔고, 교내에선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4500명 이상이 서명했다. 결국 압박에 못 이긴 매길 총장은 청문회 나흘 뒤인 12월 9일 자진 사임했다.

매길 총장에 이어 하버드대 게이 총장까지 사퇴하면서, 당시 청문회에 참석했던 샐리 콘블루스 MIT 총장의 거취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애크먼은 게이 총장이 퇴진 의사를 밝히자,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샐리, 너마저(Et tu Sally)?”라며 MIT를 압박했다. 하지만 콘블루스는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MIT 이사회는 그의 총장직을 재신임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낸 상태다. 뉴욕타임스(NYT)는 “다른 두 총장처럼 가혹한 비판을 받았는데도 콘블루스 총장은 리더십에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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