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49>] ‘우리 마음속 침팬지와 보노보’ 전쟁의 심리학
몇 해 전에 모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에 ‘심리학으로 보는 삼국지’를 장기 연재한 적이 있다. ‘삼국지’는 중국의 2세기 말부터 3세기 말까지 근 100년 동안 지속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21세기에 왜 뜬금없이 2000년 전의 삼국지 이야기를 다뤘냐고?
소설 삼국지나 정사 삼국지를 막론하고 삼국지와 그 시대를 분석한 책들이 리더십, 경영 전략, 군사 전략, 처세술 등의 시각만 있을 뿐 심리학의 관점에서 다룬 책은 없기 때문이었다. 삼국지를 꼼꼼히 뜯어 읽어보면, 단순한 도덕적인 잣대 하나만으로는 말하기 힘든 인간 세상의 다양한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소설 삼국지가 중국 후한 말기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했다면,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면서 시작됐다. 2023년 10월 7일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하마스 간 전쟁은 하마스가 로켓으로 이스라엘 지역과 군사시설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엄청난 피해를 유발한다. 승자의 입장에서도 승자 독식의 상황보다는 상처뿐인 영광이 다반사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생존과 번식을 양대 키워드로 하는 진화심리학에서는 생존을 위해 각종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이 발발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생물학자들도 가세한다. 테스토스테론은 공격성과 관련이 있는데, 이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남성들은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논리를 경제적 차원에서 부연하면 이렇다. 사람들은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석유 같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자는 부와 명성과 지위를 한꺼번에 획득하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는 전쟁이 ‘집단 정체성’ 즉, 동일한 목표를 향한 결속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생긴다고 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단순히 자기가 소속한 집단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타 집단에 대한 공공연한 경쟁심과 적개심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집단 정체성의 위험한 측면 ‘도덕적 배제’
영국 리즈 메트로폴리탄대 심리학과 스티브 테일러 박사에 의하면, 집단 정체성의 가장 위험한 측면 중 하나가 ‘도덕적 배제(moral exclusion)’다. 이것은 도덕적 기준을 오로지 자기가 속한 집단에만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집단 구성원을 착취하고 억압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너무나 쉬워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대 과학의 발달이 군수산업 발달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최첨단 무기가 도덕적 배제와 결합될 때일 것이다. 오프라인상에서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직접 적군과 마주하고 싸울 때는 상대방과 대면하기 때문에 최소한 인간적인 윤리, 죄의식 등이라도 있다. 하지만 전자 부품으로 만든 첨단 무기는 직접 전장에 나갈 필요도 없다. 레이더 추적 장치가 찾아낸 곳을 향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난다. 직접 내가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둘러서 적군의 피를 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겨를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 볼 때 전쟁이 일종의 오락처럼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고 새로운 규율과 용기, 자기희생 같은 영웅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이런 마인드가 자기방어를 위한 단순한 ‘반응적 공격(reactive aggression)’이 아니라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통해 스릴과 쾌락과 우월감을 조장하는 ‘탐식적인 공격(appetitive aggression)’으로 이어질 때는 더욱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우리 인류의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미국 럿거스대 인류학과 브라이언 퍼거슨 교수는 전쟁에 관한 각종 문헌을 섭렵해본 결과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이 항상 전쟁을 해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살인을 차치하면, 전쟁은 어떤 집단적인 살상의 동기를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있을 때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도 퍼거슨 교수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그 증거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발발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복합적인 이유로 전쟁이 감소한 결과 사망자가 감소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 본성 안에 있는 천사가 득세해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지를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침팬지와 같은 종이지만 침팬지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보노보가 있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위계질서를 갖고, 폭력을 우선시하는 사회생활을 한다. 침팬지 세계에서는 공격과 살상은 물론 전쟁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반면 보노보는 암컷이 지배하는 사회생활을 한다. 분쟁이 일어나면 폭력이 아니라 섹스로 해결한다. 침팬지의 세계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세계를 살아간다. 스티븐 핑커 교수처럼 요즘 많은 학자가 주장한다. “우리 본성에는 천사와 같은 속성이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악마 같은 유전자는 없다. 다만 후천적인 양육과 학습,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사람을 악마처럼 변화시켜 전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과연 그럴까? 나는 오히려 평생 침팬지와 보노보를 연구한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 교수의 편을 들고 싶다. 드 발 교수는 ‘내 안의 유인원’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종류의 유인원이 있다.”
우리 본성에는 천사 같은 밝은 면과 악마 같은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우리 안에는 흥부도 있고 놀부도 있다. 콩쥐도 있고 팥쥐도 있다. 지킬 박사도 있고, 하이드도 있다. 침팬지도 있고 보노보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러한 본성(nature)의 어떤 것에 더 힘을 실어줄 것인가는 후천적인 양육(nurture), 즉 문화적인 학습이 좌우하겠지만 말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블라디미르’ 혹은 ‘볼로디미르’라는 슬라브어는 ‘평화로운 통치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이름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고, 하마스 지도자 신와르 이름에는 ‘온화한’ ‘영감을 주는’ 등의 뜻이 있다. 제발 두 나라, 아니 네 나라 각각의 관계가 지도자들 이름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2024년 갑진년에는 본성과 양육이 어떻고, 우리 안에 침팬지가 있느니, 보노보가 있느니 하는 논쟁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의미해지는 그런 희망찬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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