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11> 애스터로이드 시티] 현실을 깨우는 운석의 공간과 티펫 라이즈 아트센터
웨스 앤더슨 감독의 2023년 작품,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는 미국 서부 사막 속 작은 도시다. 이 도시는 10개 객실의 모텔, 간이 식당 그리고 주유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5000년 전에 추락한 운석으로 생긴 거대한 운석 구덩이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1955년 9월, ‘소행성의 날’ 행사를 위해 도시에 모인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특유의 색채와 디자인으로 황량한 사막 마을의 풍경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화면은 강렬한 태양과 모래바람에 익은 듯한 오렌지와 민트색 계열의 팔레트로 채워지며, 1950년대 미국의 향수를 자아내는 소품과 상징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이에 더해 원자폭탄 실험으로 잇따라 피어오르는 회색 버섯구름은 이 도시가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임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깨지는 허구와 현실의 틀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진행자는 이 영화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TV쇼임을 소개한다. 관객이 보고 있는 사막 도시의 장면들이 실제로는 연극의 장면이라는 설정이다. 이에 따라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액자로 구성된다. 하나는 상연되는 연극 자체인 ‘애스터로이드 시티’이고, 다른 하나는 무대 세트 뒤에서 일어나는 작가, 연출자 그리고 배우들의 창작 과정이 고스란히 방영되는 TV쇼다.
감독은 연극 장면에서 생생한 컬러와 와이드스크린 비율을 사용하는 반면, TV쇼는 4 대 3 비율의 흑백 화면으로 표현하여 두 플롯 간 대비를 강조한다. 이러한 허구와 현실의 틀은 영화 내내 산만하게 교차하면서, 관객은 두 세계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을 경험한다. 두 액자 사이의 틀이 깨지는 결정적인 순간은 두 세계를 관통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로 생생한 오렌지색 운석 구덩이에서 오기 역을 연기하던 존스 홀이 갑자기 세트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이 있다. 그가 문을 여는 즉시 화면은 흑백의 TV쇼로 전환되며, 이번에는 연극의 주인공 오기 대신 배우 존스 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곧장 연출자를 찾아가 자신이 연기하는 극중 인물과 실제 자신 간 혼돈을 호소한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작가의 대본을 따라 창조되고 작동하는 연극 무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운석 구덩이에서 행사 중인 군중의 머리 위로 갑자기 UFO가 나타나고, 뜬금없이 3D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닮은 외계인이 내려온다. 외계인은 구덩이에 놓인 운석을 들고 날아간 후 며칠 뒤에 다시 찾아와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다. 이 장면은 극의 전개상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외계인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등장 배우들조차 연극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주인공 오기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단지 대본이 지시한다는 이유로 상대역과 대화 도중 난데없이 자기 손을 뜨거운 버너에 얹어 화상을 입는다.
이성적인 논리로 이해될 수 없는 모호한 허구의 세계 그리고 이와 혼란스럽게 교차하며 깨지는 현실의 틀을 통해 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영화 후반부에서 17번씩이나 반복되는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몽환적인 꿈의 세계와 잠에서 깨어난 세계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감독은 허구의 세계에서 모든 것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느슨한 상태에서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각하는 데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꿈에서 막 깨어난 찰나의 현실이 평소와는 다르게 환기되어 인식되듯이, 허구의 세계는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한다. 이러한 개념은 이성보다는 감각적 경험에 중점을 두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물성과 스케일을 강조한 공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태고의 풍경 위에 안착한 불가사의한 구조물들
미국 몬태나주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가장자리, 하늘과 닿을 듯이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 위에는 거대한 운석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구조물들이 안착해 있다. 별자리처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상호 관계하는 세 개의 구조물은 거칠고 원시적인 형상이어서, 특별한 정보 없이는 이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이곳에 세워졌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베어투스 포털(Beartooth Portal)’과 ‘인버티드 포털(Inverted Portal)’로 명명된 두 구조물은 높이 12m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사람인(人)’ 모양처럼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지탱되고 있다. 나머지 구조물 ‘도모(Domo)’는 30m 길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지붕이 종유석처럼 아래로 뻗어 나간 세 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이 불가사의한 구조물들은 2016년에 문을 연 ‘티펫 라이즈 아트센터(Tippet Rise Art Center)’를 위해 세워졌다. 이 아트센터는 48㎢의 목초지에서 진행하는 음악 공연과 대규모 야외 조각품 컬렉션을 통해 자연과 예술의 결합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아트센터 설립자들은 스페인의 건축가 듀오, ‘앙상블 스튜디오(Ensamble Studio)’에 광활한 대지에 예술과 건축이 개입해 공존할 방법을 문의했고, 그들은 11개의 구조물이 별자리처럼 흩어진 마스터플랜으로 응답했다. 그중 우선해서 구현된 두 개의 ‘포털’은 자연과 예술의 순례자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도모’의 지붕 아래에서는 여름 음악 시즌에 주말마다 콘서트가 열린다.
현실을 새롭게 환기하는 몽환의 창문
‘지형의 건축’으로 정의된 세 구조물은 그 원시적인 형태의 구현을 위해 땅으로부터 생산됐다. 건축가들은 포클레인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형상을 따라 철근을 배열한 후, 콘크리트와 흙을 채워 암석 같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만들었다. ‘포털’의 경우, 한 벽의 무게가 그랜드 피아노 400대에 달하는데, 완성된 두 벽을 크레인으로 동시에 일으켜 서로 기댄 채로 세웠다. 특정한 기능이 없는 거대한 구조물과 그에 투입된 노력은 혹자에게는 과도하게 여겨지면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허구 세계와 같이 이성적인 논리로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를 머금은 원초적인 구조물들이 발산하는 숭고함, 거침, 침묵 같은 감각에 온전히 참여할 때, 개인을 둘러싼 태곳적 자연의 풍경은 새롭게 환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건축이 어두운 극장이나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 실재하는 공간을 통해 존재하고 인식됨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건축과 현실을 구분하는 틀은 언제나 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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