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문화유산’된 게발선인장···척박한 한국에서 꽃 피울까[미술관 옆 식물원]

이영경 기자 2024. 1. 2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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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왔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어떤가요. 모네의 수련, 고흐의 해바라기, 아몬드 나무…. 현대미술도 예외는 아닙니다. 정연두 작가는 백년초 선인장에서 100년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의 역사를 떠올려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 등을 방문해 ‘백년 여행기’를 만들었고, 여든이 훌쩍 넘은 데이비드 호크니는 봄이 되어 솟아오르는 자연 풍경을 아이패드로 생동감 있게 담아냅니다.
미술관에는 작가의 수만큼 많은 식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만난 식물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미술관 옆 식물원’ 연재를 시작합니다. 그림 속 식물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미술을 즐기는 또다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전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식물에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 1층에 전시된 게발선인장 ‘하비’. 미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가 키우던 게발선인장에서 비롯했다. 이영경 기자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3전시실 입구에서 게발선인장 화분 하나를 볼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화분이어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엄연히 전시된 작품의 하나다. ‘올해의 작가상 2023’ 후보인 이강승의 작품 ‘하비(Harvey)’다.

‘하비’는 작고 연약한 게발선인장이다. 하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꽤 나이가 많다. ‘하비’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된 미국 최초의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1930~1978)가 생전에 키우던 식물의 일부다.

하비 밀크는 2008년 개봉한 영화 <밀크>로 친숙하다. 거스 반 산트 감독이 연출하고 숀 펜이 주연을 맡았다. <밀크>로 숀 펜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영화 개봉 이듬해인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하비 밀크에게 미국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추서한다.

영화 <밀크>의 한 장면.

정치인 하비 밀크는 1970년대 미국의 뜨거웠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한가운데서 성소수자 권리 옹호에 앞장섰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열기만큼, 이들에 대한 혐오도 거셌다. 하비 밀크는 동료 시의원 댄 화이트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하비 밀크가 암살당한 후, 그의 전 애인이자 룸메이트는 그의 유품인 게발선인장의 작은 줄기들을 잘라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하비 밀크의 유산을 잇고자 했다. 약 40년 후 동료 작가인 줄리 톨렌티노가 이를 이어받아 전시에 출품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하비’도 그 유산의 일부다. 2019년 처음 ‘하비’를 만난 이강승은 일부를 이어받아 흙에 심고 뿌리를 받았다. 이를 퀴어 커뮤니티 사람들과 공유했다. ‘하비’가 심겨진 소박하고 투박한 화분도 이강승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이강승은 이번 전시에서 2020~2022년 미국 전역에서 자라고 있는 ‘하비’의 유산을 기록한 작업도 함께 선보인다.

이강승,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2022, 삼베에 앤틱 24k 금실, 호두나무 액자, 약 38x57cm, 액자 48x67x6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후보 작가인 이강승.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Who will care for our caretakers).”

이강승은 전시에서 한국과 해외의 퀴어 역사와 유산을 ‘돌봄’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내면서 미국의 시인 패멀라 스니드의 시 구절을 인용한다. 1980~1990년대 에이즈 유행으로 수많은 성소수자가 목숨을 잃던 시기 쓰여진 시다. 이강승은 이 구절을 미국 수어 알파벳으로 디자인한 폰트로 삼베에 금실로 수놓거나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전시한다.

이강승이 게발선인장 ‘하비’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 또한 퀴어 문화유산을 이어가고 돌보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꽃을 피운 게발선인장.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게발선인장은 줄기의 모양이 납작한 타원형 모양에 윤곽이 삐죽삐죽해 게발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면 빨강, 분홍, 흰색 등 아름다운 꽃을 피워 ‘크리스마스 선인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줄기 끝마다 주렁주렁 꽃을 피어올린 게발선인장의 모습은 마치 풍성한 꽃다발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하비’는 아쉽게도 이번 겨울 꽃을 피우지 못했다. 아직 작고 연약한 개체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유리관 안이 무럭무럭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거세고,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않은 한국은 ‘하비’가 자라고 번성하기엔 척박한 환경일 것이다.

하지만 게발선인장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다. 착생식물인 게발선인장은 토양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나 암석 등에 붙어서 자라 키우기가 까다롭지 않고, 생태계를 풍부하게 한다.

실내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식당 같은 곳에서 풍성한 게발선인장 화분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국내에서도 많이 키우는 흔한 식물이기도 하기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명맥을 이어 온 ‘하비’가 게발선인장이란 걸 알았을 때 조금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강한 생명력을 지닌 게발선인장이기에 ‘하비’가 낯선 한국의 미술관에서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셈이다. 지금은 여러모로 척박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착생식물 특유의 생명력으로 ‘하비’는 성장해나갈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게이뿐 아니라, 흑인, 노인, 장애인, 그리고 우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나도 잘 압니다. 희망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희망이 없다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영화 <밀크>에서 주인공 하비 밀크는 암살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이어나가며 이같이 연설한다. 하비 밀크 이후 한국에서도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 ‘희망’을 실천하고 삶의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성소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시가 끝나고 더 많은 바람과 빛을 만났을 때, ‘하비’는 튼튼한 뿌리를 뻗어내고 새 줄기를 올리며 꽃을 피울 거란 희망을 가져본다. ‘하비’가 피울 꽃은 무슨 색일지 궁금해진다. 전시는 3월31일까지. 2000원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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