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백, 대통령이 말하라 [김영희 칼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표면화된 ‘디올백 충돌’ 양상은 이후 봉합되든 파국으로 가든, 대통령의 공적 사안에 대한 판단력, 나아가 국정능력에 의구심을 키우는 결정적 장면이 될 것이다.
김영희│편집인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1심 판결은 언론 보도에 따른 명예훼손 재판에 신기원을 열었다. 이 판단이 대법원까지 확정된다면, 한국 언론법사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다. 대통령 본인의 사안에 외교부도 소송을 청구할 수 있다며 원고 자격을 넓힌 점이나 피고인 문화방송(MBC)에 입증 책임을 부여한 점, ‘바이든’이 아닌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면서도 허위 보도를 정정하라고 한 점 등 기존 판례를 두루 뒤엎었다는 지적이 법조계와 언론학계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런 문제적 판결이 한가지 진실만큼은 상징적으로 드러낸 듯하다. 판결은 판독 불가의 윤석열 대통령 발언을 광우병 보도 사례처럼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완전한 증명이 불가능한 ‘과학적 사실’에 비견하며, ‘구조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고 바라봤다. 윤 대통령을 둘러싼 지금의 구조를 이처럼 적확히 지적한 판결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도 바이든인데.’ 2022년 9월22일 밤(한국시각), 대통령 발언 15시간 만에 김은혜 홍보수석이 ‘날리면’을 꺼내든 직후 한겨레 시스템에 올라온 미국 뉴욕 현장의 기자들 발언이다. 참모들이 즉시 보고해 ‘바이든은 아니다’라는 정도라도 우선 들었다면, 그사이 두차례 있었던 공식 브리핑을 비롯해 이해를 구할 기회는 많았다.
그런데 ‘사적 발언 공개 유감’이 전부였다. 대통령의 ‘말실수’를 기정사실로 본 참모들이 진노를 두려워해 신속히 물어보지도 못한 게 아닌지 상식적으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 며칠 뒤 사석에서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날리믄’이 윤 대통령의 평소 발언에 자주 나오는 발음”이라며 확인해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한다. 정작 재판 과정에서 외교부는 ‘날리면’도 ‘날리믄’도 주장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밝히고 욕설과 비속어 사용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면 끝났을 사안이다. 하지만 지난 12일 판결에 환영 입장을 낸 대통령실은 재판에서 확인된 비속어나 욕설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판결문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몰아붙이기만 했다.
그때와 같은 설명 불가능한 구조는 이제 ‘바이든-날리면’ 수준을 넘어 국정운영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각종 카르텔 발언이나 킬러문항 공격부터 “(다주택자) 중과세를 철폐해 서민·임차인이 혜택을 입도록 하겠다” “금융투자가 계급갈등을 완화한다” 같은 최근 발언까지, 실체가 불분명하거나 보수와도 거리가 먼 궤변에 가까운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왔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경제정책방향을 사전 설명하던 날, 자료에도 없었던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대통령이 깜짝 발표한 건 어떤가. 대통령이 어떤 집단과 소통하며 이런 인식을 갖는지, 참모들과 어떤 토론을 거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이해도 불가하다.
불가사의한 구조의 압권은 ‘김건희 리스크’다. 말과 행동의 당사자인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침묵하고, 주변이 나서 프레임을 전환시키려는 방식이 명품 쇼핑 의혹, 양평 고속도로 의혹마다 반복되어왔다. 김 여사의 디올(디오르)백 수수와 관련해선 대통령실과 친윤석열계 의원들이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총공세에 나섰다. 그런데 주변이 동원될수록 사태는 꼬인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관련 규정에 따라 대통령 부부의 선물이 국가에 귀속돼 관리·보관된다’고 밝힌 건 대표적인 코미디 발언이다. 대통령기록물법 2조의 ‘대통령 선물’ 규정을 적용하면, 사적으로 김 여사가 받은 가방이 국가적 보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친윤계 이용 의원은 보수 유튜버의 주장을 인용해 “사과와 용서, 관용은 정상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이며 좌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사과·유감 표시가 필요하다거나 나아가 김건희 특검법 거부권에 반대하는 60% 이상 국민이 졸지에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게 됐다.
급기야 직속부하였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표면화된 ‘디올백 충돌’ 양상은 이후 봉합되든 파국으로 가든, 대통령의 공적 사안에 대한 판단력, 나아가 국정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는 결정적 장면이 될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윤심을 내세운 측근들의 ‘호가호위’일 수도, 한 위원장의 입지를 키우는 ‘약속 대련’일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니 대통령이 직접 말씀하시라. 대선 전 기자회견을 통해 ‘내조 전념’을 다짐했던 전력이 있는 김 여사의 해명보다 지금 들어야 하는 건 대통령의 생각이다. 당대표 교체라는 위법적인 당무 개입까지 해야 할 사안인지 ‘관계자’가 아닌, 본인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 김치찌개 간담회나 입맛에 맞는 특정 언론사와의 인터뷰로 신년 기자회견을 대체한다면 ‘꼼수’ 비판만 커질 뿐이라는 사실도 유념하시라. 국민과 언론은 진지하게 묻고 그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
편집인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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