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M스토리] 언론인의 품격, '미스터 존스'
커뮤니케이션팀 2024. 1. 22. 16:34
영화 '미스터 존스' (2019)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주연: 제임스 노턴, 바네사 커비, 피터 사스가드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주연: 제임스 노턴, 바네사 커비, 피터 사스가드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소련의 자치 공화국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대기근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 적게는 250만 명, 많게는 1,0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홀로도모르(Holodomor)'로 명명되었는데, '아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홀로코스트(Holocaust)'와 같은 맥락에 있는 단어다. 즉, 홀로도모르는 자연재해에 의한 것도, 전쟁에 의한 것도 아닌 정치적으로 자행된 대량학살이었다. 소련이 그들을 굶겨 죽인 것이다.
영국 웨일즈 출신의 가레스 존스는 당시 철저히 은폐되어 있던 이 사건을 외부에 알린 최초의 기자다. 폴란드의 거장,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그의 이야기를 '미스터 존스'(2019)에 담았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한 기자가 의문점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거대한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 치밀하게 묘사된 수작이다. 홀로도모르 자체가 실화임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하지만, 존스가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또한 웬만한 픽션 기반의 첩보 스릴러 장르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 엔딩이 비극이라는 점이 분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데이빗 로이드 조지 총리의 외교 고문으로 발탁된 존스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프리랜서 기자의 신분이 된다. 아돌프 히틀러를 최초로 인터뷰한 경력이 있던 그는 스탈린도 만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던 터라 총리의 마지막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는 전 세계가 경제난으로 허덕이고 있는 대공황 시대에 소련이 어디서 막대한 혁명 자금을 조달하는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그의 모스크바 방문은 처음부터 예정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일주일이었던 비자는 2박 3일로 줄어들어 있고, 호텔 예약도 마찬가지이며, 모스크바에 오기 전에 통화를 했던 동료 기자는 며칠 전에 강도 사건으로 사망한 상태다. 존스는 우연히 그가 존경해왔던 퓰리처상 수상자 '월터 듀런티'를 만나 조언을 구하는데, 현실과 타협해 버린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존스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이미 위험에 빠져 있고,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망설이지 않고 모든 의혹들과 연결되어 있는 우크라이나로 향한다. 작고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던 그의 질문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의 목숨값이라는 답과 이어진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물창고라 일컬어질 만큼 비옥한 땅을 가졌는데,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다른 자치국들에 공급하기 위해 내수를 차단시켰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아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스탈린이 대기근을 악화시킨 것으로도 보고 있다. 존스의 시점으로 접하게 되는 홀로도모르의 실상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아이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아사한 형제의 살점을 잘라 끓여 먹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이미 핏기가 없다. 존스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압박과 위협을 감수하면서 스탈린의 만행을 알린다. 그렇게 홀로도모르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가레스 존스가 이듬해, 내몽골에서 납치되어 살해되었음을 알려준다. 서른 살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진실을 폭로한 대가는 가혹했던 것이다. 한편, 존스의 기사를 거짓으로 몰았던 듀런티는 73세까지 편하게 살았고, 퓰리처상도 박탈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 2023)의 마지막 자막을 보았을 때와 유사한 분노가 치솟는다.
누구나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갖고 다니는 1인 미디어 시대에는 거짓을 숨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런가? 딥페이크 기술은 더 정교해졌고, 인터넷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개인 SNS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퍼뜨린다는 점에서 언론의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대부분은 그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21세기에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언론인들의 사명감과 인간으로서의 양심밖에 없다. 가레스 존스가 무모했거나 어리석었다고 생각된다면, 언론인이 될 자격이 없다.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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