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 인터뷰 : 한반도 위기, 진단과 해법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전쟁 이래 최대 위기”라는 진단도 내놓는다. ‘이러다가 전쟁 터지는 것 아닌가’라는 시민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남북한 지도자들은 ‘치킨 게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쟁을 먼저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전쟁을 피하지도 않겠다”는 식의 말폭탄과 무력시위를 주고받고 있다. 한편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서 양안 관계 및 미중관계, 그리고 동아시아 정세에 미칠 영향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또 ‘거대한 럭비공’으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반도와 국제문제 전문가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남북한이 계획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우발적 충돌이 발생해 확전과 심지어 핵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가장 큰 우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북한 당국의 자제와 윤석열 정부의 예방 외교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는 문 교수와의 인터뷰는 1월 16일 김대중 도서관에 있는 연세대 통일연구원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는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진행했고, 녹취 정리는 황용하 평화네트워크 연구원이 도움을 주었다.
인터뷰 요약본: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125315.html
-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었다. 양안관계와 미중관계, 그리고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는가?
현상이 유지될 거라고 본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라이칭더 부총통이 당선되자마자 “미국 정부는 대만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걸 분명히 얘기했고,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난 대만 방어 약속 안 해”라고 못 박았다. 이는 미국이 대만의 독립을 부추겨 양안 위기를 조장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소한 미국 대선이 예정된 11월까지는 대만 문제가 위기 국면으로 갈 가능성은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에 더해 대만 위기까지 감당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라이칭더 차기 총통도 그동안 총통 선거 국면에서 양안 문제를 100% 활용을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오히려 상황을 안정시키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대만에서 청년 실업을 포함한 경제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중국에서 대만에 대한 추가적인 경제 제재가 나올 경우,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아마 라이칭더 총통도 실용주의적 시각에서 양안 관계를 관리해 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관건은 중국의 행보인데 신임 대만 정부와 차기 미국 행정부가 공세적으로 나오지 않는 한, 판을 깨고 긴장을 고조하는 정책을 펴지는 않을 것이다.
- 작년 11월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 이후 미중 관계가 비교적 안정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인가?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 이후에 미중 관계가 크게 개선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미국과 중국 군부 지도자들 사이에 소통 채널도 상당히 활성화가 되고 있어서 대만 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 현상 유지를 깨는 군사적 충돌이 있을 거라고 보진 않는다. 그러나 미국 국내 정치가 큰 장애물이다. 이번 11월 대선을 전후해서 ‘중국 때리기’는 더 격화되리라 본다. 의회는 물론 반중 정서를 가진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비정부단체(NGO)들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리고 기후변화와 핵확산 방지는 ‘협력’하고, 무역과 기술 분야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하는 동시에 지정학, 가치 문제에서는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이 생각대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이 단기적 안정 국면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불안해 보인다.
- 대만 총통 선거가 한중관계에도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한중관계의 관리와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양안 사태가 악화하면 우리 정부의 외교적 고심도 커질 것이다. 한중관계 관리와 개선을 위해서는 중국이 뭘 원하느냐를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미동맹은 한국의 주권적 권한이다. 한국과 미국이 동맹을 강화하는 건 좋지만 그것이 중국에 대한 위협을 가져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중립을 지켜주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주면 더 좋지만, 그게 어려우면 적대시 정책만 하지 말아달라’는 게 요구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이에 ‘우리는 중국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한미동맹과 한미일 3국 공조를 강화할 뿐이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엇박자가 커지고 있다. 중국은 한미일 3국 공조의 숨은 의도는 결국 중국 견제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사실 한국이 미국의 사드를 추가 배치하고 중거리 탄도미사일 한국 배치를 허용하는 한편, 공세적 한미일 3국 군사훈련을 감행하게 되면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쉽게 말해 한국이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조태열 신임 외무부 장관이 최근 한미동맹을 강화하겠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이다. 조 장관 발언이 실행되면 중국으로서는 아주 많이 반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관계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악화하는 상황에서 한중관계 개선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중국이 우리 편에 서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한국이 양안 문제나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이 말하는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거론하면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거나 하나의 중국 정책에 반하는 발언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가치 외교도 좋지만, 중국의 ‘핵심 이익’을 자극해 한중관계를 해치는 것은 우리의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 이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는 가치 외교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가치외교를 강조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실현을 위한 가치 외교의 십자군을 자임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 대해서도 이런 가치 외교 기치 아래 할 말은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미국에 대한 몇 가지 확신이 깔려 있어 보인다. 첫째는 미·중 경쟁에 있어서 아직도 미국이 압도적이고 우월적이다. 기회주의적 행보 보이지 말고 미국에 올인하자. 그게 우리의 국익을 위한 길이다. 둘째, 강한 한미동맹이 존속하는 한 중국은 한국을 가볍게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이 더 증대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같이 가려면 미국이 표방하는 가치외교에 편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 윤 정부는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으로 규정하고 군사, 경제, 기술, 문화, 경제 동맹을 그 하위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 외교에는 두 가지 큰 허점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도덕적 이중기준이다. 북한이나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얘기하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나 미얀마의 인권문제에 대해선 소극적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에 대해 대하는 태도가 달라 보인다. 이건 보편적 가치 외교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가치와 문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서구적 가치에 대한 지나친 편승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는 진실이고 동방은 허구이고, 서방은 이성이고 동방은 관능이고 서방은 진실하고 동방은 거짓되다’라는 이분법적 허구로 과거 유럽제국이 비서구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사조를 뜻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우리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허구의 희생자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조를 만든 서방우월주의(Occidentalism)를 표방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19세기 후반기 일본의 개혁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연상케 한다. 과연 가치를 축으로 한 서구와의 배타적 연대가 우리의 안전, 번영, 국격을 보장해 줄까? 다분히 회의적이다.
- 한반도 얘기로 넘어가보자. 새해부터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에서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남북관계를 민족 관계가 아닌 국가 관계로 정상화하겠다는 것 아닐까.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희망 사항이었는데 이를 북이 먼저 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는 오래전부터 통일부를 없애고 외교부에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관계를 봐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걸 김정은이 과감하게 선제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김정은 입장에서 보면 북이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틀에서 재미를 본 게 없고 이제 이를 정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북이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해온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헌장탑을 철거하고 대남 사업 기구들인 통일전선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그리고 민화협 등을 폐기하라는 김정은의 지시에서도 이점은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이러한 특수관계가 북에 가져오는 이득은 없고 남의 흡수통일 기회만 높여 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어 보인다. 지난 12월 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남한은 보수나 진보나 결국에 남한식 자유민주주의 의한 흡수통일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자’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인 셈이다. 이는 ‘우리민족 제일주의’에서 ‘우리국가제일주의’로의 혁명적 변환을 의미한다.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것도 이러한 현실 인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반사적 행태로 내부적 응집력을 고취하려 한 것 같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북한 주적론이 계속 대두되어왔다. 2023년도 국방백서에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섬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전군을 대상으로 한 정훈교육 자료에서도 이점이 강조되고 있다. 김정은이 북한 헌법에 대한민국을 주적으로 기재하고 이를 인민들 대상으로 적극적 교육시키라는 지시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1월 2일 담화에서 “문재인, 참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면서 만났을 때 한 얘기와 돌아서서 한 행동의 불일치를 비난했는데, 문재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를 지낸 분으로서 이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판문점과 평양에서 만나 두 정상이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을 채택하고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 군중들 앞에서 두 정상이 비핵화와 평화의 약속을 했는데 남한이 이행한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불만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철도·도로 연결 등 합의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고, 심지어 타미플루도 지원도 무산됐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앞서가면 한미공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게다가 북측이 남측 제안을 받아들여 ‘싱가포르 선언을 미국이 성실하게 이행하면 영변 핵시설을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는 내용을 2018년 9월 평양선언에 포함한 것도 획기적 결단이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를 구체화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문재인 정부로서는 미국과의 충분한 협의와 설득이 가장 큰 과제였다. 이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느라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을 잃게 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지금 회고해 보면 분명히 패착이다.
- 하노이 노딜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 트럼프가 중단을 약속했던 한미연합훈련도 재개하고 문재인 정부도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한 것도 악재로 작용한 것 아닌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중단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북미, 남북 관계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군비증강 문제는 남북관계가 악화하기 전까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호간에 적대적 의도가 크게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점은 속임수(cheating)와 위험분산(hedging) 구분의 모호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서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동결시키면서도 1990년대 말부터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은밀하게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이걸 속임수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주선 하에 2003년까지 경수로 2개 지어준다고 했는데, 진전되는 걸 보면 2003년까지 약속된 경수로가 지어질 가능성이 없다. 그럼 우리도 비장의 카드가 있어야 될 것 아니냐’는 위험분산의 시각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농축 우라늄 비밀 개발은 그런 헷징, 위험분산 전략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가 국방비를 증액하고 3축 체제를 획득했던 것도 ‘우리가 북한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도 무기체계를 증강해야 되겠다’라는 안보 딜레마의 공포에서 비롯된 헷징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은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 중·하반기에 각종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수소폭탄까지 실험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2018년에 상황이 반전되었는데, 무기체계라고 하는 게 주문한 걸 쉽게 취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경로의존성에 의해 무기 획득이 지속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2019년 2월에 하노이 노딜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국방부 입장에서는 계속 군사 태세를 갖춰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와 위험분산의 모호성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이 남북한 신뢰구축을 어렵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친미에 치우쳤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치팅과 햇징 사이의 틈을 줄이기 위해서 신뢰구축은 필수적이다. 남북, 북미 모두 그런 신뢰구축이 없었다.
- 최근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심상치 않게 나오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전문가들인 로버트 칼린 미들베리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최근 ‘북한이 전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칼린, 해커 두 분 모두 최고의 북한 전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의가 없다. 그러나 그들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정은이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하고는 ‘계획에 의한, 한국전쟁 식의 대규모 전쟁을 결심했다’는 건데,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지 ‘전쟁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최근 김정은의 연설문을 쭉 보면, 모두 조건절이다. ‘전쟁해야 한다면 전쟁을 피하지 않고 남한에 핵을 포함한 모든 무기를 이용해서 남쪽을 평정하고 초토화하고 공화국의 영역에 포함하겠다’는 식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적어도 자기들이 먼저 전쟁을 벌이지는 않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얘기하는 것도 똑같다. ‘북한이 도발하면, 즉시·강하게·끝까지 응징하고 북한 정권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조건절이다. 다시 말해, 양측 모두 계획에 의한 선제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칼린과 해커의 시각과는 다르다.
- 우발적 충돌과 확전 위험은 어떻게 보는가?
전면전이나 국제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우발적 충돌이 국지전, 전면전으로 가고 심지어 핵전쟁으로 확전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김정은의 최근 연설문을 보면 NLL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해에 단 0.001mm라도 들어오면 전쟁 도발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럴수록 우리 정부의 NLL 사수 의지는 더욱 강해진다. 설상가상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불 때, 대북전단 살포까지 다시 시작되면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충돌이 발생하면 접경 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물론이고, 남북한 간의 정면 대결과 확전 가능성도 아주 높아질 것이다. 북한보다 재래식 전력이 훨씬 우세한 한미연합전력이 우발적 충돌에 공동으로 대응하게 될 경우, 북한은 체제 및 국가 존속에 위협된다고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이 핵무력의 제2의 임무 즉, 전술핵 선제 사용을 고려하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또 9·19 군사합의의 파기로 무인기도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무인기 정찰이 가시화되고 이에 대한 요격 시도가 있게 되면 또 확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정전협정과 한미연합사령부가 관장하는 전시작전통제권이 있어서 확전되는 걸 막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남북 양측이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하면서 무력 사용을 짧은 시간에 급격히 증강하게 되면 미국이 그러한 확전을 막기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우발적 충돌이 발생했을 때 남북한의 소통 채널이 있어 확전 방지에 기여했지만, 현재에는 그러한 소통 채널마저 없어진 상황이다. 오판, 오해의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높아지는 건 명약관화이다. 민간 외교, 소위 백채널 외교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고, 미국, 중국이 나서서 개입, 중재해줄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걱정스럽다.
- 남북관계와 외교, 그리고 국방을 아우르는 안보 전문가로서 보기에 현재 한미동맹의 대북 억제력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아주 작동을 잘한다고 본다. 요즘 와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확증(security assurance)이 너무 과도하여 북을 너무 자극하는 것 아닌가’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 경우, 한미동맹의 재래식, 핵 억제력이 전략적 불안정을 초래해 상황을 더 악화할 수도 있다. 이것을 ‘상승에 의한 능동적 억제(proactive deterrence by escalation)’라고 한다.
특히 북한에 대한 군사적 억제력이 작동하느냐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 또는 미국 정부나 국민의 인식과 평가가 아니라 한미 연합전력의 능력, 의도, 그리고 정치적 의지에 대한 북한의 평가다. 북한은 미국이 세계 최강의 재래식, 핵전력 보유국가로서 자신을 상대로 그러한 군사력을 사용할 의도와 의지가 있다고 여긴다. 북한에 대한 억제가 압도적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계속 핵무장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북한이 최소한의 핵 억제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세력은 ‘미국의 억제력이 부족하다. 심지어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국에 계속 확장억제 강화 등의 요구를 압박하고 있고 이로 인해 미국이 한반도에 전략무기를 수시 배치하고 있고 한미연합군사훈련도 작년 한 해 80회 이상을 또 했다. 그리고 오는 8월 ‘을지 자유의 방패’ 훈련 기간에는 핵 확장억제 기획, 운용 연습도 할 예정이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이 북한을 되레 더 자극하고 있으니 상황은 악화일로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 미국의 확장억제가 북한은 억제하고 있는데, 국내의 핵무장론자들은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각에선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는 독자적인 핵무장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만일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갖는다고 하면 한미동맹이 깨질 가능성이 상당히 크고 각종 국제제재로 인해 한국 경제가 상당히 피폐화될 것이다. 설령 한미동맹이 유지된다고 가정해도 우리는 5-6년 동안 개발할 수 있는 핵탄두 수는 10개 이하의 소량에 그칠 것이다. 100여개 이상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 효과적인 핵 억제력을 구축하기 어렵다. 어찌 보면 ‘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할 수 있다. 북한이 겁먹는 건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핵 역량이지, 소량의 한국 핵무기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한다고 해서 한국의 독자적인 대북 핵 억제력이 효과를 낼 것이라고 예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핵무기 개발에 성공, 자위력을 갖기 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특히 한국의 핵무장으로 한미동맹이 깨진 상황이라면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으로서는 한국이 핵 개발을 지속하여 핵 군비 경쟁으로 치달을 바에는 예방 전쟁 차원의 선제 타격으로 먼저 쓸어버리자는 발상을 할 수도 있다. 지역 안보 질서에 있어서도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핵을 갖겠다고 하면 일본도 대만도 핵무장을 원하게 될 것이고 북·중·러의 핵무장력도 증강되어 이 지역 내 핵무기의 수평적, 수직적 확산을 촉발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안보 딜레마의 심화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자해적인 조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 일각에선 한미가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보다는 군비통제를 목표로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일부 학자와 전문가들은 이런 논리를 펴는 것 같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기정사실 아닌가. 그걸 인정하고 시작하자. 완전한 비핵화를 대화 조건이자 목표로 내세우면 북한이 대화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당장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보다 북한이 더 많은 핵무기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돼야 하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헤커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북의 핵무기 증강을 멈추고,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폐기 (halt, roll back, dismantle)’하는 접근이 실용주의적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미 수교를 선제적 카드로 이용하여 핵 군비통제와 핵 군축을 구체화하는 것이 위기 확산을 막는 현실적 접근이라는 이들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북한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따른 행동과 조치를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 대한 전망은 어떤가?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을 보는가?
우선 트럼프는 자신의 외교적 협상력을 강력하게 믿는 사람이다. 지금도 김정은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당선되면 북미 정상간 대화가 바로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로서는 북한 핵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상당한 정치적 업적이 될 것이다. 관건은 트럼프가 2019년 하노이 실패를 어떻게 복기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가, 그리고 미국 주류 세력의 저항이 얼마 큰가에 달려 있다.
트럼프가 북한과의 정상외교를 재개할 경우, 윤석열 정부는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 그리고 한미동맹에 주는 타격도 클 것이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동맹’은 안 하겠다는 게 트럼프 정책이니 방위비 분담 문제도 다시 대두될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한반도 전쟁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또 한미 연합 군사훈련과 연습이나 미국의 전략무기 한반도 전개에 들어가는 비용도 한국이 부담하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워싱턴 선언 자체에도 변수가 생기는 동시에 한미일 3국 공조에도 큰 구멍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미동맹에 다걸기를 해온 윤석열 정부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워질 것이다.
- 올해에도 한반도와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 같다. 윤석열 정부가 이거 하나만은 꼭 명심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보다는 전쟁을 피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폈으면 한다. 예방 외교에 좀 더 큰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대통령과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을 지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민주주의에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와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게 공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남북이 서로 자제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서로 공세적인 억제 방식을 추구하면서 확전 가능성을 키우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위태스럽다. 대화가 당장 어려우면 자제부터 하는 게 현명하다. 기본적으로 남북 간 군사훈련연습의 하향조정이나 잠정 중단, 남북 통신선 복원, 남북, 북미 대화 채널 재가동 등 신뢰구축 조치들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9·19 남북군사합의도 복원시키는 것이 직접적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조치들이 예방 외교를 구축해나가는 시작점이지 않을까 싶다.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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