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덕희' 라미란 "서민영웅 서사? NO…덕희에 '짱'이라 응원하고파" [MD인터뷰](종합)
"'시민덕희'는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
오는 24일 개봉.
[마이데일리 = 강다윤 기자] "코미디 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한다는걸 또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뭘 해도 그 안에 코미디가 있다고 항상 생각을 해주시더라고요. 배우로서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도 코미디든, 위트든 다른 지점이 한 스푼은 들어가 있는."
라미란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이데일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는 24일 영화 '시민덕희'(감독 박영주) 개봉을 앞두고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 덕희(라미란)에게 사기 친 조직원 재민(공명)의 구조 요청이 오면서 벌어지는 통쾌한 추적극이다. 2016년 세탁소를 운영하던 김성자 씨가 보이스피싱 총책 및 조직 전체를 붙잡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라미란은 극 중 전화 한 통으로 전 재산을 잃은 평범한 시민 덕희 역을 맡았다. 동시에 덕희는 두 아이를 사랑하는 모성애 강한 엄마이자, 손대리의 제보전화에 직접 총책을 잡으러 칭다오로 떠나는 강단 있는 인물이다.
이날 라미란은 "실화라는 점에서 되게 흥미로웠다. 총책을 잡았다는데서 '진짜?" 이랬다. 사실 시나리오 봤을 때는 '중국에 가서 이렇게 맞대응을 해서 잡았다고?' 했는데 그건 페이크라고 하더라"라며 "어쨌든 이 사건은 당시 뉴스에도 날 정도로 흔한 일은 아니다. 되게 멋있다고 생각해서 하고 싶었다. 보자마자 한다고 했다"라고 작품 선택 이유를 밝혔다.
"다른 배우가 안 떠올랐어요. '아, 내가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저 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뭔가 다른 예쁜 언니들을 대입해 보니까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하하. 제가 하는 걸로."
'시민덕희'의 시나리오는 실화를 바탕으로 탄생했지만, 그 실제 주인공 김성자 씨를 촬영 중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영화적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만큼 실화와는 별개로 생각했기 때문. 그렇게 라미란은 '시민덕희'를 덕희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작업했다.
"김성자 씨가 시사회 때 와서 보셨어요. 대기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금도 아주 단단하시고. 마지막 엔딩 보시면서 많이 위로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셨다더라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실화의 인물이 있기 때문에 폐가 되면 안 되잖아요. 너무 왜곡을 하면 힘들 수가 있어서. 되도록이면 그렇게 비치지 않으려고, 폐가 되지 않으려고 신경 썼죠."
'시민덕희'는 라미란에게 또 하나의 만남을 선사했다. 단편 '1킬로그램'으로 칸영화제 씨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진출하고, 중편 '선희와 슬기'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일찌감치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박영주 감독과의 만남이다. 박 감독은 '시민덕희'를 통해 첫 번째 상업영화를 대중에게 선보인다.
그런 박 감독과의 첫 미팅에서 라미란은 여리여리하고 소녀 같은 목소리의, 대학생이 나온 것 같다 생각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리딩과 촬영에서 또 현장에서 하고자 하는 게 뚜렷했다. 그를 잘 관철시켰고, 스태프들을 유연하게 아우를 줄 알았다. 상업영화 입봉이라는 감독이 지휘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라미란은 "('시민덕희'가) 2020년에 촬영했는데 바로 개봉을 못하니까 감독님이 편집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몇 년을 하셨다. 몇 년 동안 계속 매달려계셨다"며 "너무 귀여우면서도 힘이 있는 감독님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회 전 배우들끼리도 시사회를 했는데 보고 나서 감독님께 한 마디 했다. '고생 많았어요'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있는 게 쉽지 않다"라고 깊은 애정을 전했다.
2020년 코로나19 시국에 촬영됐던 '시민덕희'는 드디어 4년 만에 개봉을 맞이하게 됐다. 그 사이 라미란은 영화 '정직한 후보' 시리즈와 드라마 '나쁜엄마', '잔혹한 인턴' 등에 출연하며 열일했다. 특히 이중 '정직한 후보'는 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때문인지 라미란의 새 영화 '시민덕희'를 향해 라미란표 코미디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라미란은 "코미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태 '정직한 후보' 외에 코미디는 없었다. '걸캅스'도 나는 완전 정극으로 생각한다. 치타여사도 라미란이라는 인물에 충실했지 코미디는 아니었다"며 "'시민덕희'도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 물론 웃음도 있고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지만 코미디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라미란은 "코미디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다는 건, 내가 그렇게 많이 생각되어지나보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재밌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어디있다고"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정작 라미란은 빵 터진 웃음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해해 유쾌함을 더했다.
"왜요? 아, 이런걸 좋아하시는구나. 재밌고 위트있는걸 좋아하지만 그러니까 어떻게보면 텐션이 높지 않은거에요. 그러니까 텐션은 엄청 낮은데 그래서 웃긴가봐요. 이렇게 말하는게."
라미란의 말처럼 '시민덕희'는 코미디라기보단 덕희의 성장극에 가깝다. 라미란이 든든히 서사를 이끄는 가운데 유쾌한 웃음은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이 담당한다. 덕희와 함께 뭉친 봉림, 숙자, 애림은 일명 '덕벤져스' 혹은 '팀 덕희'라 불리며 찰떡같은 케미스트리를 선사한다. '텐션 높은' 이들은 유쾌한 현장 분위기까지 책임졌다.
라미란은 "현장에서 잔잔할 수가 없었다. 은진이가 노래를 시작하면 윤주가 화음을 쌓는다. 그러면 어느새 어머니 합창단처럼 넷이 노래를 하고 있다. 은진이가 텐션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인 윤주는 호르몬이 없어서 금방 지친다. 나랑 혜란이는 확 오르지 않아서 아이들의 텐션이 올라가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며 "넷이 촬영 할 때 너무 재밌었다. 붙어 있는 신들이 많으니까 그냥 복작복작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떠들고, 슛들어가면 그냥 뭐가 연기인지 모르게 그냥 했다"고 즐거웠던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일단 밥을 같이 많이 먹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친밀도가 밥심에서 나온다고 본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으면 확실히 그 케미가 보인다. 이들이 얼마나 친밀한가가 화면을 뚫고 나와서 보이더라"라며 "지방촬영도 많으니까 숙식을 거의 같이 했다. 계속 같이 붙어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케미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서로 어색한거 하나 없이 우리가 봐도 너무 친해보이더라"라고 남다른 케미스트리의 비결을 귀뜸했다.
"제가 중심을 잡을, 그게 없었어요. 사실 그렇게 막 의식하면서 뭘 하진 않아요. 저도 휩쓸릴 땐 휩쓸리고. 저 혼자 아무리 중심을 잡아도 옆에서 무드를 맞춰줘야 살아나는거라서. 그러니까 뭔가 이야기하고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아요. 이들도 어떤 순간에는 저랑 같이 공감하고 느끼고 있으니까. 그럴 때 또 같이 묻어주고 했던 것 같아요. 중심을 잡기 위해서 뭘하고 이런건 없었어요."
라미란이 감정선을 잡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시민덕희'의 흐름이 이를 도왔다. 처음 덕희는 억울하고 답답했다. 누구도 내 마음처럼 나서주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을 보낼 때는 갈 때까지 가는 거였다. 절망의 끝.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덕희의 옆에는 '가자'라며 말하는 숙자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봉림, 택시가 있는 애림이 있었다. 그런 상황들이 오면 '가자'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라미란은 '서민영웅 서사'라는 이야기에 손을 내저었다. 그는 "덕희는 영웅이 아니다. 대단한 게 아니고, 나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봤다. 덕희라는 인물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봤다. 대입을 할 수는 이겠지만 이 사람이 영웅이라고 보이길 바라진 않는다"며 "돈을 받을 수 없는 걸 알지만, 제보를 받은 이상 주소가 있어야 한다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덕희가 눈을 뜨고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피해자로 남았겠지만. 그래서 멋있었다"라고 말했다.
만약 라미란이 덕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를 묻자 라미란은 "제보전화가 온다면, 경찰에 알리는 정도까지는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반려가 되고 소외가 되면 내가 직접 나설까 싶다. 일단 그 단계까지 가는 게 힘들 것 같은데. 덕희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물러설 곳이 없다면 자료조사까지는 했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이어 "그런데 중국에 간다는 건, 그냥 친구들이 있으니까 갈 수 있었던 거다. 만약 나도 이런 친구들이 있다면 중국에 가긴 갔을 것 같다"며 "그런데 정말 중국까지 가는 건 너무 힘든 결정이었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 보통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적당히 타협하지만, 덕희는 타협점이 없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합의금이요? 그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고민을 해봤는데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남의 돈 가지고 생색내는 거잖아요. 내 돈 가지고. 만약 그 상황까지 갔다면 저도 돌려주러 갔을 것 같아요. 그 정도까지 갔으면 더 잃을 것도 없잖아요. 내 자존심이라도 지켜야죠. 그분(김성자 씨)도 그때 총책이 합의금을 제시했대요. 그런데 끝까지 안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라미란의 이야기에서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은 서민영웅'보다는 '인간 덕희'에 집중하고픈 마음이 느껴졌다. 앞서 시사회에서도 '덕희는 응원해주고 싶은 친구'라고 했던 라미란. 그가 실제 덕희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응원은 '잘했다'라는 이야기였다. 많은 피해자들이 스스로가 창피해서, 멍청해서, 바보 같아서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생각한다며.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제 주변에도 생각보다 많았어요. 이런 영화를 한다고 하니까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이런 방식으로 당했다고?' 싶은 것도 많았고 데이트앱을 통해서도 있었고. 이틀 만에 빚 다 끌어서 억을 가져다준 친구도 있고. 많이 많이,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많이 많이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덕희에게도 '참 짱이다', '잘했다', '고생했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라미란은 자신이 생각한 '시민덕희' 결말 이후의 이야기도 전했다. 보상금 1억이 나오지도 않았고, 합의금 3억 도 받지 않았을 거라며. 아이들을 같이 케어해 주는 숙자나 복림이에게 얹혀있지만 어떻게든 덕희는 살아갈 거라고. 덕희 정도의 의지와 강단이면 충분히 살아갈 테고, 더 꿋꿋하게 잘 살 것이다. 이미 한번 스스로를 일으킨 사람은 그게 쉽게 꺼지지 않기 때문에.
라미란은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 출신으로, 서른 살이던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스크린에 첫 데뷔했다.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뽐낸 끝에 tvN '막돼먹은 영애씨', '응답하라 1988' 등 여러 대표작을 남겼다. 2021년에는 영화 '정직한 후보'로 제41회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짧지 않았던 라미란의 무명생활. 덕희처럼 스스로를 일으킨 경험이 있는지 묻자 라미란은 "내가 무명일 때도, 일이 없을 때도 자존감이 엄청 높았다. 지금도 높은 편이다. 그래서 사실 절망한 적이 없다. 차비가 없어서 못 다닐 때도 먹고살게 되더라. 누구한테 얻어먹든 갑자기 돈을 주던. 돈벌이가 하나도 없어도 '괜찮아, 안 죽어'라고 했다"며 회상했다.
이어 "지금도 그렇다. 일 없어지면 백수 되는 거다. 배우가 일 없으면 백수 아니냐. 나중에 정말 일 없어지고 벌어놓은 것도 다 까먹고 없으면 동사무소에서 쌀 타먹으면 되고"라며 "한 번도 막 절망해 보거나 그러지 않았다. 내가 힘들 때도 그때 좀 즐겼던 것 같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난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끝으로 라미란은 '시민덕희'를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전했다. 그는 "우리들이 시사할 때 큰 관에서 봤는데 '아, 이렇게 보는 게 다르구나. 그러면 못 느꼈을 것들을 느낄 수 있구나. 이래서 영화를 영화관에서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표현 방식은 다르다. 분명 취향에 맞는 것들이 있을 거다. 영화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극장을 찾아주시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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