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이 언급했던 백제 순타태자는 누구?…무령왕릉 앞 6호분 주인공?[이기환의 Hi-story]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의 현현이었습니다.
이 무령왕릉 발견과 함께 기존의 1~6호분까지 7기의 무덤이 말끔히 보존·정비되었는데요.
그러나 ‘무령왕릉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거꾸로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고분이 한 기 있었습니다.
무령왕릉-6호분의 앞쪽에 존재했던 29호분입니다. 1933년 우연히 발견된 고분인데요.
■아마추어 가루베의 무단발굴
사실 첫 등장부터 팔자가 셌습니다. 발견자가 하필이면 도굴꾼이나 진배없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었거든요.
일본어 교사였던 가루베는 고고학의 ‘고’자도 모르는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루베는 1927년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하면서 공주 일대를 미친듯이 헤집고 다녔습니다.
가루베는 훗날 “1927~32년 사이 답사한 백제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송산리 고분 등 100여기(182기)는 실측조사했고, 천정의 구조로 분류한 백제고분이 738기에 이른다”고 떠벌렸습니다.
이를 두고 조선총독부 소속 학자들조차 “연구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송산리 6호분과 29호분의 ‘사굴’ 행위였습니다.
즉 가루베는 1933년 7월 배수구 일부가 확인된 6호분을 무단 발굴을 자행하는데요. 무엇보다 현장을 보존하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조선총독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6호분 무덤방 내부가 너무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면서 “유물이라고는 토기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발자국만 어지러이 남아있을 뿐”이었다고 비판했답니다. 그런데 가루베는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깁니다.
“6호분에서…호박의 굽은 옥 1개, 진주 환자옥 80여개, 순금제 귀고리, 허리띠 장식, 대도(큰칼), 작은 칼의 파편, 금동제 달개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빈약했던 웅진 시대의 유물 중에 단연 빛나고 있었다.”
가루베는 서울에서 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무덤 안을 깨끗히 치워놓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가루베의 도굴본능
그런데 6호분을 발견한 직후(1933년 8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왕릉관람로~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할 때 현장을 기웃거리던 가루베가 또 하나의 고분을 찾아낸 겁니다. 그것이 29호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가루베는 계속 미적거리다가 11월초가 되어서야 발견 사실을 보고합니다,
뒤늦게 29호분 정식발굴에 참여한 총독부 촉탁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는 ‘가루베가 정식보고 없이 사전에 도굴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죠.
11월 15일 현장으로 내려간 아리미쓰는 1~5호분을 관리하는 묘지기 두 사람의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8월 여름 (무덤의 천정돌을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금제장신구와 철정, 칠기편 등을 가져갔다”는 겁니다. 아리미쓰는 “이 과정에서 금제화판형식금구라든가, 영락(달개)이 달린 금제원궁형금구, 은제소옥 등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천정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되어….”
아리미쓰는 특히 “돌방의 내부에는 유물을 뒤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고, 관대에는 벽돌을 뜯어내어 울타리처럼 돌려놓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행위를 지적한 겁니다.
■발견부터 기구했던 팔자
이렇게 첫 등장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던 고분이 ‘29호분’입니다.
정식 조사에 들어간 조선총독부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식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않은 겁니다.
다만 발굴 전후와 무덤방 내부의 모습 등을 촬영한 사진 31장과 실측도면을 남겼는데요.
그나마 1970~80년대 대대적인 정비·보존 과정에서 위치를 잃어버렸답니다.
그러다가 1933년 발굴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이던 아리미쓰가 발굴 69년 만인 2002년 정식 보고서를 펴내면서 정확한 지점을 특정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행방이 모연해진 29호분’이 새삼 부각되었고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475~538)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이 29호분을 지목했습니다. 발굴조사는 2021년 3~7월 약 80일간 진행되었고요. 최근 조사보고서(<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29호분 발굴조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파견된 중국인이 제작한 전돌’
물론 1933년 한번 발굴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이번 조사에서 획기적인 유물이나 부대시설이 확인되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행방불명된 29호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는 것도 나름의 성과였고요. 또 무덤방을 밀봉했던 전돌 140여점을 수습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이것은 건업 사람이 만들었다(造此是建業人也)’고 새겨넣은 전돌이 한 점 확인된게 눈에 띕니다.
‘건업’은 지금의 난징(南京)인데요. 당대 중국 양나라(502~557년)의 수도였습니다. 즉 양나라, 그것도 도읍(건업)에서 파견된 기술자가 만든 전돌이라는 얘기죠. 인근 6호분에서도 양나라 기술자 이름이 새겨진 전돌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역시 무덤방을 닫을 때 박아넣은 전돌에서 ‘양나라 관아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총책임자로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왕릉급 고분의 축조에 멀리 양나라 기술자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자료입니다.
이 29호분은 관을 놓은 자리가 동서쪽으로 두 곳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백제 왕족 부부를 순차적으로 묻은 합장묘로 추정됩니다. 여성이 먼저 서쪽에 묻히고, 남성이 나중에 동쪽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동쪽 관대(남성쪽) 바닥면에서 관을 짤 때 쓰인 반원형 두정(머리가 큰 못) 4점을 추가로 확인했어요. 1933년 조사에서 19점의 관못이 보고된 바 있거든요. 이번 조사까지 합해 모두 23점을 수습한 겁니다.
■옹기종기 고분 4기의 관계
그렇다면 되찾은 29호분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무령왕릉·6호분·5호분의 관계는 어떨까요.
우선 무덤의 구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무령왕릉 및 6호분은 양나라에서 유행한 ‘올(all) 전돌(벽돌) 무덤이고요.
반면 5호분과 29호분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5호분은 전통적인 백제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인데요. 그러나 관대(관을 놓은 장치) 등 일부에만 전돌을 놓았고요. 29호분은 ‘벽면=돌’로 쌓고, ‘바닥면, 관대, 무덤방을 밀봉한 장치=전돌’로 깔아놓았습니다. 정리하면 5호(돌방+관대·무덤길 일부 전돌)-29호분(돌방+바닥면·관대·무덤방 밀봉석 등 전돌)-6호·무령왕릉(전체 전돌) 등으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고분의 선후관계와 주인공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연구자마다 ‘백가쟁명’입니다.
이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펴낸 발굴보고서는 조심스럽게 29호분이 무령왕릉과 6호분보다 늦다고 판단했습니다.
29호분에서 무령왕릉(주로 연꽃무늬 전돌)과 6호분(주로 동전무늬 전돌)에서 사용했던 전돌이 다 보이고요.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사비백제 시기에 각지에서 쓰인 관못(머리가 반원형)이 출토되는 게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이런 형태의 관못은 29호분(합장묘) 중 나중에 조성된 동쪽 관대(주인공은 남자로 추정) 바닥에서 확인되었거든요.
그래서 늦게 안장된 이 남성이 6세기 중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 겁니다. 5호와 29호분은 거의 동시대로 보이지만, 5호분이 약간 빠르다는 견해를 피력한 이도 있습니다.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의 선후를 따지기도 쉽지 않고, 따라서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대중의 눈높이에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에는 최소 20여기, 최대 60~80기에 이르는 고분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 웅진시대 하면 만 63년(475~538)을 가리키죠. 그때의 백제왕이라면 누굴까요.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 천도) 등 5명입니다. 이중 부여천도를 감행한 성왕은 부여 왕릉원(옛 능산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중하총’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등과 그 가계 왕족으로 좁혀집니다.
구체적으로 따져볼까요. 공주 천도와 함께 왕위에 오른 문주왕과 삼근왕은 같은 가계(부자)이고요.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477)의 아들이어서 다른 가게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삼국사기>)이거나 ‘이복형제’(<일본서기>)입니다.
어떻든 간에 동성왕-무령왕은 같은 가계죠. 그러니 공주 왕릉원의 가계는 문주왕-삼근왕계, 동성왕-무령왕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왕릉원의 입지상 얼추 맞아 떨어집니다. 구릉 윗부분, 즉 1~4호분은 한성 백제의 전통을 잇는 돌방 무덤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막 한성에서 천도한 문주왕-삼근왕계가 1~4호분을 차지한 거구요.
그렇다면 그 아래 5·6호와 6호분, 무령왕릉이 동성왕-무령왕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령왕릉과 바로 붙어있는 6호분의 주인공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어색한 동성왕-무령왕 조합
하지만 이 동성왕-무령왕 조합이 굉장히 어색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두 분이 그렇게 사이좋게 누워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구요. <삼국사기>는 “501년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한 뒤 무령왕이 즉위했다”고 하면서 심상찮은 여운을 남기죠.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는 겁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무열·502)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백성들이 무도하고 포악한 동성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같은 가계, 즉 부자간(삼국사기) 혹은 이복형제(일본서기)라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뭐가 좋다고 바로 곁에 무덤을 쓴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4호분 조사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이 경주 금관총 출토품과 같은 형태이거든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이 결혼동맹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4호분 출토 허리띠가 동성왕이 받은 혼인예물일 수도 있다는 거죠. 따라서 4호분=동성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왕릉원 구릉 서쪽에 조성된 교촌리 3호분이 있는데요. 역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전돌무덤입니다. 최근들어 이 ‘교촌리 3호분=동성왕릉’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동성왕을 무령왕릉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모셨다는 거죠.
■6호분=순타태자?
그럼 무령왕계가 묻힌 무령왕릉-6호분-5·29호분을 한번 살펴볼까요. 후대에 조성된 5·29호분은 차치하고요.
무령왕릉이 먼저냐, 6호분이 먼저냐는 설을 논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설명해봐야 갈수록 미궁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무령왕릉과 버금가는 6호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여러 설이 나왔는데요.
동성왕설은 이미 언급했고요. 또 무령왕의 전처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젊은 여성의 치아가 확인됐는데요.
이 여성의 나이로 미뤄봤을 때 성왕의 생모일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첫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의 무덤이 6호분이라는 견건해였습니다. 이 여인이 무령왕보다 먼저 사망하자 6호분을 축조해서 안치했고요. 정작 무령왕은 별도의 무덤(무령왕릉)을 조성해서 훗날 죽은 젊은 후처(계비)와 묻혔다는 겁니다.
여러 주장 가운데는 ‘순타 태자설’도 흥미롭습니다. 순타태자, 이름 처음 들어보세요.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인데요.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만 보입니다.
즉 <일본서기> ‘게테이(繼體)’조는 “513년(무령왕 13) 8월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서거(薨)했다”고 전했습니다.
무령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겁니다. 276년 뒤인 789년 <속일본기> ‘간무(桓武)’조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입니다.
“12월 간무(桓武) 천황(일왕)의 생모인 황태후(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가 죽었다…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781~806년 사이 재위한 간무 일왕(781~806)이 백제계 황태후인 야마토노니가사(후에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로 창씨개명)의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그 여인의 선조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였고요.
■‘백제 무령왕의 후예’임을 밝힌 일왕
여기서 기억할만한 일화가 있죠. 한·일 월드컵 개막을 6개월여 앞둔 2001년 12월 당시 일왕인 아키히토(明仁)가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깜짝 발언한 겁니다. 이 발언의 의도와 의미를 두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떤 연구는 <일본서기>가 순타태자의 죽음에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자를 썼다는 점을 주시합니다. 백제 태자에게 ‘훙(薨)’을 섰다면 백제 무령왕을 ‘천자(황제)’로 예우했다는 얘기거든요.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그럴 리 없다는 겁니다.
순타태자의 죽음을 ‘졸(卒·대부의 죽음)’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얘기죠. 필시 <일본서기> 편찬자가 <백제본기> 같은 당대 백제의 원사료를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6호분의 주인공은 아버지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의 무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보다 뒤에 조성된 5호분과 29호분 역시 무령왕의 혈족일 가능성이 짙고요. 특히 29호분에서도 나중에 묻힌 남성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직후에 부인이 묻힌 공주땅에 사후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추론입니다.
공주나 부여 백제왕릉원의 개별 고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워낙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구릉 윗부분에 조성되어 있는 1~4호분이 한창 발굴조사 중이거든요. 이 조사에서 또 어떤 경천동지할 이야깃거리나 터져나올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차분히 지켜보죠. 참 한가지 고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굴꾼이나 진배없는 가루베가 이 무렵 붙여놓은 고분번호, 즉 29호분이 지금까지 공식명칭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지금 6호분으로 일컬어지는 벽화 전돌 고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령왕릉에 버금가는 고분인데, 아무렴 가루베 같은 자가 부여한 번호로 불려서야 되겠습니까.(이 기사를 위해 윤용혁 공주대 교수와 권오영 서울대교수, 오동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김환희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학예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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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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