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이기환의 Hi-story](118)

2024. 1. 22.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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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 중에 행방이 묘연했던 29호분이 발굴되면서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한 백제 왕릉의 전모가 드러났다. 왕릉원 윗부분은 공주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과 그 아들인 삼근왕계가, 밑에는 무령왕을 중심으로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 그리고 무령왕계 왕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 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의 현현이었습니다.

이 무령왕릉 발견과 함께 기존의 1~6호분까지 7기의 무덤이 말끔히 보존·정비됐는데요. 그러나 ‘무령왕릉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거꾸로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고분 한 기가 있습니다. 무령왕릉-6호분의 앞쪽에 존재했던 29호분인데요. 1933년 우연히 발견된 고분입니다.

■아마추어 가루베의 무단 발굴

사실 첫 등장부터 팔자가 셌습니다. 발견자가 하필이면 도굴꾼이나 진배없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었거든요. 일본어 교사였던 가루베는 고고학의 ‘고’ 자도 모르는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루베는 1927년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하면서 공주 일대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습니다.

가루베는 훗날 “1927~1932년 답사한 백제 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송산리고분 등 100여 기(182기)는 실측 조사했고, 천장의 구조로 분류한 백제 고분이 738기에 이른다”고 떠벌렸습니다. 이를 두고 조선총독부 소속 학자들조차 “연구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송산리 6호분과 29호분의 ‘사굴’ 행위였습니다. 즉 가루베는 1933년 7월 배수구 일부가 확인된 6호분 무단 발굴을 자행하는데요. 무엇보다 현장을 보존하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조선총독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1897~1993)는 “6호분 무덤방 내부가 너무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면서 “유물이라고는 토기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발자국만 어지러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고 비판했답니다. 가루베는 서울에서 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무덤 안을 뒤진 뒤 “아무것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가루베의 도굴 본능

그런데 6호분을 발견한 직후(1933년 8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왕릉관람로~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하는 공사 중에 현장을 살피던 가루베가 또 하나의 돌방무덤(석실분)을 찾아낸 겁니다. 그것이 29호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가루베는 계속 미적거리다가 11월 초에야 발견 사실을 보고합니다.

뒤늦게 29호분 정식발굴에 참여한 총독부 촉탁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는 ‘가루베가 정식보고 없이 사전에 도굴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죠. 11월 15일 현장으로 내려간 아리미쓰는 1~5호분을 관리하는 묘지기 두 사람의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1927년 공주고보 일본어 교사로 부임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 일대의 고분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그는 “1927~1932년에 답사한 백제 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송산리 고분 등 100여 기(182기)는 실측 조사했고, 천장의 구조로 분류한 백제 고분이 738기에 이른다”고 떠벌렸다. 사진은 그가 번호를 찍어 표시해놓은 백제 고분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국립공주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자료



“8월 여름 (무덤의 천장 돌을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금제장신구와 철정, 칠기편 등을 가져갔다”는 겁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천장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 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돼….”

아리미쓰는 특히 “돌방의 내부에는 유물을 뒤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관대에는 벽돌을 뜯어내 울타리처럼 돌려놓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지적한 겁니다.

■발견부터 기구했던 팔자

이렇게 첫 등장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던 고분이 ‘29호분’입니다. 정식 조사에 들어간 조선총독부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식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않은 겁니다. 다만 발굴 전후와 무덤방 내부의 모습 등을 촬영한 사진 31장과 실측도면을 남겼는데요. 그나마도 1970~1980년대 대대적인 정비·보존 과정에서 위치를 잃어버렸답니다.

그러다가 1933년 발굴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 촉탁이던 아리미쓰가 발굴 69년 만인 2002년 정식 보고서를 펴내면서 정확한 지점을 특정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행방이 묘연해진 29호분’이 새삼 부각됐고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백제(475~538)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 번째로 이 29호분을 지목했습니다. 발굴조사는 2021년 3~7월 약 80일간 진행됐고요. 최근 조사보고서(<29호분 발굴조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파견된 중국인이 제작한 전돌’

이번 조사에서 행방불명된 29호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는 것도 나름의 성과였고요. 무덤방을 밀봉했던 전돌 140여 점도 수습했습니다. 특히 ‘이것은 건업 사람이 만들었다(造此是建業人也)’고 새겨넣은 전돌이 눈에 띕니다.

‘건업(난징·南京)’은 당대 중국 양나라(502~557)의 수도였습니다. 사실 인근 6호분에서도 양나라 기술자 이름이 새겨진 전돌이 확인된 바 있죠. “양나라 관아의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6호분과 29호분 모두 왕릉급 고분의 축조에 멀리 양나라 기술자가 동원됐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자료입니다.

이 29호분은 관을 놓은 자리가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조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백제 왕족 부부를 순차적으로 묻은 합장묘로 추정됩니다. 여성이 먼저 서쪽에 묻히고, 남성이 나중에 동쪽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동쪽 관대(남성 쪽) 바닥 면에서 관을 짤 때 쓰인 반원형 두정(머리가 큰 못) 4점을 추가로 확인했어요. 1933년 조사에서 19점의 관못이 보고된 바 있거든요. 이번 조사까지 합해 모두 23점을 수습한 겁니다.

■옹기종기 고분 4기의 관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가루베 지온 등이 1933년 11월 송산리 29호분에서 가루베 지온 등이 ‘사굴(개인 무단발굴)’로 유물(철정)을 수습한 사실이 적힌 유물카드가 남아 있다.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확인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되찾은 29호분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무령왕릉, 6호분, 5호분의 관계는 어떨까요. 우선 무덤의 구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무령왕릉 및 6호분은 양나라에서 유행한 올(all) 전돌(벽돌) 무덤이고요.

반면 5호분은 전통적인 백제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입니다. 다만 관대(관을 놓은 장치) 등 일부에만 전돌을 놓았고요. 29호분은 ‘벽면=돌’로 쌓고, ‘바닥 면, 관대, 무덤방을 밀봉한 장치=전돌’로 깔아놓았습니다.

정리하면 5호(돌방+관대·무덤길 일부 전돌)-29호분(돌방+바닥면·관대·무덤방 밀봉석 등 전돌)-6호·무령왕릉(전체 전돌) 등으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고분의 선후 관계와 주인공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연구자마다 ‘백가쟁명’입니다.

이번에 나온 발굴보고서는 29호분이 무령왕릉과 6호분보다 늦다고 판단했습니다. 29호분에서 무령왕릉(주로 연꽃무늬 전돌)과 6호분(주로 동전무늬 전돌)에서 사용했던 전돌이 다 보이고요.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사비백제 시기에 쓰인 관못(머리가 반원형)이 출토되는 게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이런 형태의 관못은 29호분(합장묘) 중 나중에 조성된 동쪽 관대(남자로 추정) 바닥에서 확인됐거든요. 그래서 늦게 안장된 이 남성이 6세기 중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5호와 29호분은 거의 동시대로 보입니다.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공주 왕릉원 고분의 주인공을 판단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에는 최소 20여 기, 최대 60~80기에 이르는 고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백제 웅진시대 하면 만 63년을 가리키죠. 그때의 백제왕이라면 누굴까요.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재위 477~479)-동성왕(재위 479~501)-무령왕(재위 501~523)-성왕(재위 523~554·538년 사비 천도) 등 5명입니다. 이중 사비 천도를 감행한 성왕은 부여 왕릉원(옛 능산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중하총’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등과 그 가계 왕족으로 좁혀집니다.

구체적으로 따져볼까요. 공주 천도와 함께 왕위에 오른 문주왕과 삼근왕은 같은 가계(부자)이고요.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477)의 아들이어서 다른 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삼국사기>)이거나 ‘이복형제’(<일본서기>)입니다. 그러니 공주 왕릉원의 가계는 문주왕-삼근왕계, 동성왕-무령왕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왕릉원의 입지상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구릉 윗부분, 즉 1~4호분은 한성기 백제의 전통을 잇는 돌방무덤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막 한성에서 천도한 문주왕-삼근왕계가 1~4호분을 차지한 거고요.

그렇다면 그 아래 5·6호와 29호분, 무령왕릉에는 동성왕-무령왕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령왕릉과 바로 붙어 있는 6호분의 주인공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88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29호분의 구조. 전형적인 백제식 돌방무덤의 형식이지만 바닥 면과 관대, 무덤방 밀봉석 등은 전돌로 구성돼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어색한 동성왕-무령왕 조합

그러나 이 동성왕-무령왕이 그렇게 사이좋게 누워 있을 수 있을까요. <삼국사기>는 “501년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한 뒤 무령왕이 즉위했다”고 하면서 심상찮은 여운을 남기죠.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는 겁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무열’조·502)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백성들이 무도하고 포악한 동성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같은 가계, 즉 부자간(<삼국사기>) 혹은 이복형제(<일본서기>)라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뭐가 좋다고 바로 곁에 무덤을 쓴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4호분 조사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장식이 경주 금관총 출토품과 같은 형태이거든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이 결혼동맹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4호분 출토 허리띠가 동성왕이 받은 혼인예물일 수도 있다는 거죠. 따라서 ‘4호분=동성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왕릉원의 남쪽에 조성된 교촌리 3호분이 있는데요. 역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전돌무덤입니다. 최근 들어 이 ‘교촌리 3호분=동성왕릉’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동성왕을 무령왕릉에서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모셨다는 거죠.

뒤늦게 29호분 현장에 달려간 총독부 촉탁 아리미쓰 교이치는 묘지기 두 사람의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8월 여름 (무덤의 천장을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일부 유물들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리미쓰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천장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이고 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됐다”고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지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호분=순타태자?

그럼 무령왕계가 묻힌 무령왕릉-6호분-5·29호분을 꼼꼼히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무령왕릉과 버금가는 6호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여러 설이 나왔는데요. 동성왕설은 이미 언급했고요. 무령왕의 전처설도 나왔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젊은 여성의 치아가 확인됐는데요.

이 여성의 나이로 미뤄보면 성왕의 생모일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첫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의 무덤이 6호분이라는 겁니다. 이 첫 번째 부인이 무령왕보다 먼저 사망하자 6호분에 안치했고요. 정작 무령왕은 별도의 무덤(무령왕릉)을 조성해 훗날 죽은 젊은 후처와 묻혔다는 겁니다.

‘순타태자설’도 흥미롭습니다. 즉 <일본서기> ‘게테이(繼體)’조는 “513년(무령왕 13) 8월 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서거(薨)했다”고 전했습니다. 무령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겁니다. 276년 뒤인 789년 <속일본기> ‘간무(桓武)’조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입니다.

“12월 간무 천황의 생모인 황태후(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가 죽었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781~806년에 재위한 간무 일왕(재위 781~806)이 백제계 황태후의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황태후의 선조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였고요.

가루베는 왕릉관람로~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할 때 현장을 기웃거리다가 또 하나의 돌방무덤(석실분)을 찾아냈다. 그것이 29호분이다. 가루베는 계속 미적거리다가 11월 초가 돼서야 발견 사실을 보고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 무령왕의 후예’임을 밝힌 일왕

이와 관련해서 기억할 만한 일화가 있죠. 2001년 12월 당시 일왕인 아키히토(明仁)가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으므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깜짝 발언한 겁니다.

29호분에서는 ‘이것은 건업 사람이 만들었다(造此是建業人也)’고 새겨넣은 전돌이 한 점 확인됐다. ‘건업(난징·南京)’은 당시 양나라 도읍이었다. 1933년 발굴된 6호분에서도 ‘양나라 관아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총책임자로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 발언의 의도를 두고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만…. 어떻든 6호분의 주인공은 아버지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의 무덤일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뒤에 조성된 5호분과 29호분 역시 무령왕의 혈족일 가능성이 짙고요.

29호분의 재발굴에서 확인된 유물들. 관을 장식한 못과 연꽃무늬·동전무늬 전돌이 보인다. 무령왕릉과 6호분 등 인근 고분 및 다른 지역 고분의 출토유물과 비교하면 29호분은 6세기 중엽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추론입니다. 워낙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구릉 윗부분에 조성돼 있는 1~4호분을 한창 발굴조사 중이거든요. 이 조사에서 또 어떤 경천동지할 이야깃거리가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차분히 지켜보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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