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새 회사 찾아 기뻤는데… 회사가 저를 지옥으로 데려갑니다[정우열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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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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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사람에게 ‘생애 주기’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해 취업하고 또 아이를 낳아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고, 스스로 이에 맞춰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느꼈습니다. 결혼 이후 오래 다닐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그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승진이나 성과, 급여보다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는 편을 선호해왔기에 좋은 기회에 괜찮은 직업을 찾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직업이 이렇게 저를 괴롭힐 줄은 몰랐습니다. 새 직장에서 맡은 업무는 고객 상담 업무였습니다. ‘감정 노동’을 하게 됐고 정신과를 찾게 됐습니다. 주 6일 근무와 잦은 민원으로 불면증을 겪었고 체중이 줄었습니다. 이런 증상으로 찾은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바쁜 업무로 마음은 피폐해지기만 합니다. 업무에 지쳐 병원에 다니는 일상이 제 하루와 한 달, 일 년의 전부가 됐습니다.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회사였는데 그 회사가 저를 점점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병원에서 잠을 많이 자고 걱정을 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이 고통이 사라질까요. 가족의 만류와 지금의 물질적 풍요를 뿌리치고 정말 그만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혼이고 이미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저를 받아줄 다른 직장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지금 다니는 곳과 같은 조건의 회사를 다시 갈 수 없을 것이란 걱정도 듭니다. 이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건 저와 가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다니지 않을 경우에 주변을 더 힘들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괴롭습니다.
돌이켜보면 자라면서 항상 공무원을 꿈꿨던 것 같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며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의 “(누군가로부터) 적은 월급이라도 꾸준히 받았으면 좋겠다”라던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늘 바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언니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선 각자의 삶을 꾸리고 있지만 청소년기와 20대엔 언니와 같은 초등학교와 중·고교, 대학교까지 나왔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부모님이 신경 쓰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최대한 조용히 생활했고요. 평소 책임감도 강한 편입니다.
이제는 빨리 세월이 지나버려서 퇴직하고, 남편과 조용히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내 집에서 조용히 온전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또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됩니다. 계속 이런 일상이 계속되다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듭니다. 그렇다고 지금 다니는 회사를 관두게 된다면 제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퇴직하지 않고 이 문제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요.
김혜주(가명·33·직장인)
혜주씨, 사연을 접하면서 당신이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은 그간 스스로 자기 삶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꾸려온 것 같습니다. 대학과 결혼 그리고 취업 등 숨 가쁜 노력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기 삶이 새로운 직장이라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으로 흔들리고 있어 고민이 크실 겁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땐 자신을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존재가 무엇인지를 따라가 봐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새 직장과 과도한 업무가 원인으로 보이지만, 사실 찬찬히 살펴보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스트레스의 정도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혜주씨의 경우엔 고객을 상담하는 업무 자체보다 이 일을 통해서 마주하는 감정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은 자신의 성격을 평소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책임감은 보통 미덕으로 여기지만 때로 지나치면 스트레스가 되곤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상담으로 접하는 고객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내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객의 한마디 한마디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상담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좌절을 마주할 가능성도 큽니다.
특히 상담 업무에서는 무엇보다 상대방과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타인과의 ‘거리 두기’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배우고 또 익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타인과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혜주씨는 자라면서 대학까지 같은 곳으로 선택했을 정도로 언니에게 깊이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언니와 각자의 삶을 꾸리게 됐다고 하셨지만 이런 성장 환경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타인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성향일수록 상담 업무에서 고객의 말이나 의견, 감정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만약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가족이나 주변을 지나치게 신경 쓴 결과일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거나 ‘주변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괴롭습니다’라는 혜주씨의 말에서 이런 생각이 엿보입니다.
자영업으로 늘 바쁘고 힘들어 보이던 부모님을 보며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는 착한 마음이, 스스로에겐 과도한 책임감을 가지게 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성장 과정에서 충족되지 않은 의존 욕구는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밀착하며 과도하게 기대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하죠. 의존하고 싶어서 오히려 과도한 책임감을 가지고, 책임감을 크게 가졌을 때만 관계가 지속된다는 인식이 생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애 주기가 있다고 했지만 사실 인간의 삶은 당연히 그 주기에 맞춰 완벽하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갈등이 있을 수 있죠. 혜주씨는 그간 갈등이 생겼을 때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는 편을 택해왔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쁜 부모님이 신경 쓰지 않도록 조용히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언니를 따라 진학하는 등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가족이나 남, 주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문제가 없도록 행동해 왔고요.
혜주씨의 고통은 지난 삶의 태도가 누적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책임감과 동시에 독립적인 선택 대신 남에게 의존했던 심리적 패턴이 반복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경계를 지으려면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주변을 신경 쓰며 지냈던 혜주씨에게는 쉽지 않을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소소한 것부터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출·퇴근길에 혜주씨가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듣거나, 집이나 회사의 책상을 본인 스타일로 꾸며볼 수도 있습니다. 취미라고 하신 맛집이나 사진 찍기도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규칙적으로 해나가면서 본인의 감정에 집중하고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기 시간을 가지면서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두는 겁니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당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혜주씨를 중심에 놓고 남이 나를 지지하는 관계를 경험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당신을 위해서 남이 무언가를 해주는 경험이 반복되면 본인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조금씩 부탁해 보고 타인의 도움을 어느 정도 거절해보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내키지 않더라도 꾸준히 해보는 것입니다. 본인의 소중함을 아는 일은 업무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고객과의 상담에서 갈등이나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원 상담을 지속해 받았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병가나 긴 휴가 등을 통해 보다 치료에 집중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혜주씨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이 업무를 맡을 다른 누군가까지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성장 과정이나 삶의 경험에서 놓쳤던 본인에게 집중해 보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이런 힘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고객 상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니더라도 상사와 동료 등 인간관계에서 다른 압박을 느낄 수도 있고요.
혜주씨가 직장을 옮기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분명히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에 휘말렸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위기가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찬찬히 돌보면서 남이 아닌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또 남이 아닌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혜주씨가 되길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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