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방송인은 외모=실력? "얼굴·몸 보여주려고 나온 것 아닙니다"

남보라 2024. 1. 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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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여성 방송인의 생방송 분노
한국도 온라인 성희롱·괴롭힘·협박
방송인 몸만 확대한 유튜브 영상 다수
감정노동, 업무 위축시키지만 혼자 감당
"언론사가 제도적으로 대응·지원해야"
캐나다의 교통방송 리포터 레슬리 호턴이 지난해 11월 생방송 도중 자신에 대한 남성 시청자의 외모 조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엑스 캡처

지난달 씁쓸한 외신 뉴스 한 건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캐나다 여성 리포터의 '분노의 생방송' 관련 보도였다. 교통방송 리포터인 레슬리 호턴(59)은 지난해 11월 생방송 중간광고 시간에 배가 나온 것을 조롱하는 "임신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남성 시청자로부터 받았다. 방송이 재개되자 호턴은 "지난해 암으로 자궁을 절제했다. 그리고 이것이(배가 나온 것이) 내 또래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응수했다. 할리우드 배우 미셸 파이퍼, 제이미 리 커티스 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영상을 공유하며 그를 응원했다. 35년 경력의 베테랑 리포터가 외모로 괴롭힘당했다는 사실은 다시 오래된 질문을 소환했다. 여성 언론·방송인들은 왜 실력이 아닌 외모를 평가받는가.


"아나운서 말은 음소거한 후 몸만 확대"

한국 사정은 어떨까.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섭외에 나섰다.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기자 등 방송에 나오는 비연예인 여성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이런 폭력에 노출돼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랜서 계약에 미칠 영향, 2차 피해에 대한 우려 등으로 대부분이 인터뷰를 꺼렸다. 익명 인터뷰를 전제로 하고서야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로 일했던 A씨를 최근 만날 수 있었다.

A씨가 아나운서가 되자마자 유튜브엔 그에 대한 ‘편집 영상’이 떴다. 짧은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진행한 전체 방송 화면 중 그의 몸만 확대해 편집한 것이었다. 어떤 영상은 그의 목소리를 음소거한 채 그가 치마를 입고 앉아 있는 장면들만 이어 붙여놓았다. 외모 평가와 성희롱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제가 보도한 말은 다 끄고 몸만 확대해 놓은 건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만 당한 게 아니에요. 가족들이 볼까 봐 구글에 영상 삭제 요청을 한 동료도 있어요."

유튜브에 생중계되는 방송을 할 땐 성희롱 댓글이 없는 날이 없었다. 식당 옆 자리에서 밥을 먹던 남성들이 날씨 방송이 나오는 TV를 흘끗 보더니 “쟤는 얼굴도 못생겼는데 왜 기상캐스터를 하냐”고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그들은 날씨 보도 내용은 듣지도 않았다. 그가 쏟은 노력과 차곡차곡 쌓은 실력을 알아보는 시청자는 드물었다. “제 얼굴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좋은 정보를 잘 전달하고 싶어서 이 직업을 택했어요. 그런데 현실이 너무 달라서 그만두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여럿 있었어요."

유튜브에서 '아나운서'라는 검색어만 넣어도 아나운서의 몸만 세로로 자른 후 선정적인 제목을 단 영상이 무더기로 나온다. 유튜브 캡처

여성 방송인에게만 적용하는 이상한 기준

영상 매체인 방송 출연자들의 이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남성 언론·방송인들에겐 ‘신뢰감을 주는 깔끔한 이미지’를 요구하는 반면 여성들은 '극도로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요구받는다. 이목구비부터 몸매, 의상, 화장, 헤어스타일 하나하나를 평가당한다.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몇 년 전 안경을 쓰고 뉴스 진행을 했다가 논란이 될 만큼 제약도 많다. 여성들만 '이상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1년 언론인 404명을 조사한 결과 여성 기자들이 남성 기자들보다 외모 평가, 성희롱·성차별 발언을 더 자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엔 남성도 맡았던 기상캐스터는 10여 년 전부터 ‘젊고 늘씬한 여성’의 직업으로 굳어지는 퇴행도 일어났다. "여성은 외모가 곧 실력"이라는 폭력적인 등식이 오히려 공고해졌다.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2018년 4월 12일 안경을 착용하고 '뉴스투데이'를 진행하자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MBC 캡처

이는 여성을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 성별 고정관념 때문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여성의 전문성을 따지기 전에 외모 등으로 먼저 가치를 평가하는 관습이 존재한다"며 "이 때문에 여성을 방송이나 뉴스에서 '부가적인 볼거리로 제시되는 존재'로 여기는 차별적 시각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정관념은 여성의 일을 위협한다

이 같은 문화는 결국 여성의 일을 위협한다. 여성 언론·방송인들은 외모에 대한 압박으로 다이어트와 몸 치장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악순환에 빠진다. 김창욱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는 “외모 평가라는 괴롭힘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면서 감정 노동을 하게 되고, 외모 가꾸기라는 보상 없는 노동까지 더해진다”고 말했다. 직업 진입 장벽도 기형적으로 변형됐다. 기상캐스터 교육기관 관계자는 “10여 년 전 종편들이 개국하며 광고 직전 나오는 날씨 방송이 시청률 경쟁 도구로 활용됐고, 기상캐스터들이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는 등 외양만 강조하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기상캐스터 지망생들을 상담하면 '키가 작은데도 할 수 있을까요' '예뻐야 될 수 있죠' 등 실력보다 외모에 대한 질문부터 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의 취재활동도 위축시킨다. 여성 기자들을 심층 면접해 2022년 '여성기자 온라인 괴롭힘에 관한 저널리즘 사회학적 연구 보고서'를 낸 김창욱 교수는 "몇몇 기자는 외모 관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꺼려져서 방송 출연을 전부 거부한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여성 신문 기자들도 외모 공격에 노출돼 있다. 김 교수는 "‘기자수첩’처럼 기자의 사진이 공개되는 유형의 기사 작성을 꺼린다는 기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신문 기자의 온라인·영상 뉴스콘텐츠 제작 투입이 늘면서 성희롱·괴롭힘에 노출되는 경우가 늘었다"며 "여성 기자들은 '기자 혐오'와 '여성 혐오'라는 이중의 혐오를 겪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이미 2015년 여성 기자들에 대한 온라인 괴롭힘을 '언론자유를 저해하는 공격'으로 규정하고, 각 언론사에 온라인 괴롭힘 식별·모니터링을 위한 가이드라인 제작, 지원시스템 도입 등을 권고했다. 이 기구는 지난해 10월 여성 언론인에 대한 온라인 폭력 모니터링에 관한 새로운 지침도 발표했다.

OSCE가 ‘여성 기자 온라인 괴롭힘’ 관련 언론사에 권고한 조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지난해 10월 4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 언론인에 대한 온라인 폭력 모니터링'을 위한 새 지침을 발표했다. OSCE 팔로마 마드리갈

하지만 한국 언론사는 관련 제도를 제대로 도입한 경우가 드물다. 기상캐스터 등 방송인 중엔 프리랜서 비율이 상당해 대부분 혼자 감당하고 있다. 김수아 교수는 “언론사가 여성들에 대한 괴롭힘, 성희롱 등이 심각한 문제이며 차별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제도적 지원과 대응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모 평가가 그 자체로 괴롭힘이라는 사회적 인식 전환은 보다 근본적 해법이다. 김창욱 교수는 “외모 품평을 하는 사람들은 그저 ‘놀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수아 교수는 “뉴스 댓글을 주로 쓰는 40대 이상 세대는 성평등 교육 경험이 적고 성별 고정관념에 젖어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평생교육 차원에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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