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해외 대형 출판사들, “AI 번역금지” 국내 출판사에 계약 요구
판권 계약 맺으며 ‘AI 안돼’ 넣어… 어린이책-논픽션 등 장르 안가려
표지-오디오북 제작에도 적용
출판계 “AI학습에 쓰일 우려 반영”… 번역가들 “효율 높이려면 AI써야”
기존 계약서의 번역 관련 조항에는 ‘번역을 정확히 충실하게 해야 한다’, ‘번역가의 자질을 검증해야 한다’, ‘문장을 수정하거나 축약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만 있었는데 최근 들어 AI 번역기 사용 금지 조항이 추가됐다.
해외 출판사들의 AI 번역 금지 요구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대형 출판사 창비의 계열사인 미디어창비와 중형 출판사 동아시아도 각각 어린이책과 논픽션 출간 계약을 최근 맺으면서 해외 출판사의 요구로 AI 번역 금지 조항을 넣었다.
특히 해외 출판사들은 계약서에 ‘표지, 디자인, 오디오북 제작에도 AI 사용을 금지한다’는 조항까지 넣고 있다. 번역뿐 아니라 표지, 디자인 등 책 제작 전반과 오디오북 등 지식재산권(IP) 활용에도 AI 사용을 막은 것이다. 산하 브랜드만 100여 개에 달해 ‘출판계의 공룡’으로 불리는 펭귄랜덤하우스나 세계적 학술 출판 그룹 존와일리앤드선스처럼 유명 저자들의 판권을 대거 보유한 해외 대형 출판사들이 이 같은 요구를 하고 있어 국내 출판계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해외 대형 출판사들이 AI 번역기 활용을 금지한 표면적인 이유는 ‘오역 우려’다. AI 번역기가 문장을 직역해 저자의 뜻을 왜곡한다는 것. 예를 들어 지난해 5월 한국문학번역원이 연 심포지엄 ‘AI 번역 현황과 문학 번역의 미래’에선 AI 번역기에 의한 오역 사례가 다수 발표됐다. 예컨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의 일부분(“바람이 분다. 살아보자꾸나”)을 챗GPT는 “바람이 일어납니다! …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잘못 번역했다.
출판계에선 AI 번역기에 원문을 입력하는 과정에서 콘텐츠가 유출될 가능성을 해외 출판사들이 우려하는 영향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에서 쉽게 수집할 수 있는 기사나 논문과 비교해 책은 상대적으로 AI 학습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AI 번역기에 전문이 입력되는 순간 책 내용이 머신러닝(기계학습)에 쓰일 수 있다. 표지나 디자인 역시 AI가 제작에 관여하면 AI가 이를 학습할 수 있다.
국내 출판사들은 법적 책임을 우려해 해외 출판사의 요구사항을 번역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국내 출판사 관계자는 “이미 번역가들에게 구두로 AI 번역기 사용 금지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 대표도 “번역가들이 AI 번역기를 몰래 사용하다 걸리면 국내 출판사들이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AI 번역 금지 조항을 번역가와의 계약서에 따로 넣을지 검토 중”이라고 했다.
번역 오류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AI 번역기를 이미 활용하고 있는 국내 번역가들은 이 같은 요구에 반발하고 있다. 한 프리랜서 번역가는 “챗GPT나 파파고를 쓰면 번역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진다. 특히 일반 문장들은 거의 완벽한 번역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다른 번역가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중요한 소설보다는 비교적 문장이 단순한 실용서나 학술서 번역에 AI 번역기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AI 번역기를 활용해 번역 건수와 수입이 2배 늘었는데 이를 멈출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최근 번역 시장에선 AI 번역기로 초벌 번역을 하고 이를 번역가가 검수해 완성도를 높이는 ‘기계번역 사후교정(MTPE)’ 방법이 일반화되고 있다. 예컨대 국내 AI 번역 기업 플리토는 MTPE 일감을 대량으로 받아 소속 번역가나 프리랜서 번역가에게 감수만 맡긴다. 한 번역가는 “번역 단가가 낮아 생계 때문에 번역을 그만둔 이들이 MTPE가 늘면서 다시 업계로 돌아오고 있다. AI 번역기 활용의 긍정적인 측면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출판사들이 번역가들의 AI 활용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책의 특정한 정보가 포함돼 있을 경우 AI 번역기 활용 과정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을 의심해 볼 수는 있다. 지난해 미국 할리우드 영화·방송작가들이 챗GPT가 기존 대본을 짜깁기할 우려가 있다며 파업을 벌인 것처럼 저작권 논란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판계가 AI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번역가와 AI 번역기가 공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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