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8쪽 ‘모비딕’을 232쪽으로… 읽히지 않는 고전, 의미 없다
진형준 전 홍익대 교수
새벽의 파주 자유로를 가로지르던 자동차 엔진 소리가 10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최근 100권으로 완간된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살림출판사)은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낸 진형준(72) 전 홍익대 불문과 교수가 2014년부터 몰두한 작업이다. 매일 새벽 2시 일어나 오전 내내 번역했고, 매주 이틀씩 경기도 용인시 집에서 파주 살림출판사를 찾았다. 진 교수는 “홀로 100권 번역이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5권쯤 번역하자 재미를 느껴 푹 빠졌다”고 했다. 2017년 8월 홍익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후로 강의 등 제안을 거절하고 번역에 더욱 몰두했다.
진 교수가 느낀 ‘재미’란 세계문학컬렉션의 모토인 ‘축역’에 있다. 원전을 단지 축약(縮約)하는 게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돕는 축역(縮譯)이라고 했다. 그는 “번역 과정에서 직역과 의역이란 탈출구로 도망가 버린 기존 번역서를 많이 발견했다”며 “제가 한 축역은 기본적으로 의역에 속하지만 작품의 의미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직역에 속한다”고 했다.
시리즈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시작해 시대순으로 영문학·러시아문학·독문학 등을 두루 포함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로 끝난다. 영어본과 전공인 불어본을 함께 대조하며 번역했다. 전체적인 맥락과 의미 전달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일부 내용을 과감하게 삭제했고, 표현을 다듬었다. ‘모비딕’의 경우 938쪽(전 2권·열린책들)이지만 진 교수의 번역본은 232쪽이다. 진 교수는 “‘모비딕’의 두 주인공 에이해브와 스타벅이 아주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부분은 거의 완역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등 영문 번역과 ‘변신’ ‘동물농장’ 등 불문 번역 20여 권은 완역이라고 한다.
그는 “읽히지 않는 고전은 고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고전을 장식처럼 쌓아두고 읽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요즘은 문제가 있어요. 제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원작자의 의도나 작품에 담겨 있는 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의 독자입니다.” 모든 책의 뒤에 해설을 실었다. 작가의 생애와 세계사 등을 엮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힌트를 담았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제가 번역한 ‘신곡’을 줬더니 ‘재미있다’고 말해서 놀랐어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인 저도 ‘고전은 어렵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거죠.”
‘축역본을 읽는 것은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니다’란 비판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축역본을 놓고 연구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죠. 그러나 저는 일반 독자를 위해 썼습니다. 특히 중·고교 국어 선생님들이 이 고전을 읽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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