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을 떠난 순수한 자아란 없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 1. 2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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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자화상의 미학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자기 자신이야말로 변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까. 타자를 사랑하거나 증오해도, 결국 자신을 통해서 사랑하고 증오하는 법. 고통도 쾌락도 슬픔도 즐거움도 결국 자신이 느끼는 법. 그러다 보니 도대체 자신에게 무관심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왜? 자신을 대상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바로 자신을 대상화하는 장르다. 자화상은 어떻게 그리나? “어떻게”라니, 그냥 나 자신을 보고 그리면 되지!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신체 구조상, 인간은 육안으로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다. 현재의 자신을 보려면 거울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일 뿐 육안으로 직접 본 자신은 아니다. 기어이 육안으로 직접 보겠다면, 수술을 통해 눈알을 앞으로 뽑아낸 뒤 그 눈알로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까지 본 자신은, 더 이상 평소의 자신이 아닐 것이다.

17∼18세기 화가 요한 안톤 굼프의 자화상(1646년).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는 없기에, 자화상을 그리려면 누구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따라 그리거나 상상하여 그릴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의 자화상은 없는 셈이다. 사진 출처 위키갤러리
17∼18세기에 독일어권에서 활동한 화가 요한 안톤 굼프의 자화상을 보라. 이 작품은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거울이 필수적임을 잘 보여준다. 엄밀하게 말해 굼프가 그리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다. 놀랍게도 거울 속 자신과 자화상 속 자신은 다르다. 둘 중 어느 모습이 진짜 자기 모습일까. 그것을 알 수는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뒷모습뿐이므로. 자기 평소 모습과 거울 속 자기 모습과 자화상 속 자기 모습이 다 다르니, 우리는 대체 어디서 우리 자아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일까. 때로 우리는 자아를 찾기 위해, 타인이 만들어 낸 자기 이미지를 수집하는 넝마주이가 된다.

남이 만든 이미지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려 오는 것은, 평소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새삼 경청하려 드는 이의 목소리다. 자신을 인식하려 드는 순간, 평소 자아는 사라지고 인식하려 드는 자아가 등장하는 법. 결국 우리는 평소의 자아를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 아무리 뚫어져라 거울을 들여다봐도 평소 자신은 온데간데없다. 거울에 보이는 것은 거울을 의식하고 있는 낯선 사람뿐. 이제 거울 앞에 선 사람은 평소 자기 표정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화상은 자기 평소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혹은 보아야 하는 자기 모습이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의 자화상은 불가능하다.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게 인간일진대, 자화상이라고 거짓을 그리지 않겠는가.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미술가 솔 스타인버그가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간단한 삽화로 표현한 1948년 작품. 사진 출처 위키아트
그러면 어떡하라고? 자화상 그리기를 때려치우라고?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자화상 그리는 모습 자체를 그리면 된다. 미국의 삽화가 솔 스타인버그의 1948년 작품을 보라. 이 그림은 자화상 그리는 행동 자체를 그린 자화상이다. 자화상의 역동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자화상 그리기란, 결국 기존 대상을 모사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리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요컨대, 자화상은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이다.

모든 자기표현이 다 이렇지 않을까. 표현해야 할 자신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것을 옮겨적는 것이 자기표현이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려는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다. 일기도 그렇지 않은가. 단순히 자기 마음속을 옮겨 적는 것이 일기 쓰기가 아니다. 뭔가를 적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일기 쓰기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아가 탄생한다. 사랑을 찾지 않으면 사랑이 없듯이, 자아를 찾지 않으면 자아는 없다.

자기 자아는 너무 초라해서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다고?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자아는 자신을 표현하려는 시도 그 자체에서 탄생하므로, 과거의 자신에 대해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다.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으로 피칠갑이 되고 뒤범벅이 된 자신의 흔적과 파편들을 차분히 주워 모으는 과정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게 자아다. 그 형성 과정을 글로 쓰면 일기요, 그림으로 그리면 자화상이다. 그런 과정과 무관한 순수한 자아란 없다.

스타인버그가 스스로 마지막 자화상이라 칭한 1999년 작품에는 얼굴을 가린 손바닥과 얼굴 그림만 등장한다. 자신을 기록하는 것이 자화상이지만, 작가의 표현과 해석에 따라 평소 모습과 달리 재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elephant.art 홈페이지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스타인버그가 남긴 최후의 자화상(1999년)을 보자. 84세에 이른 스타인버그는 자신을 보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늙어 추해진 자기 모습을 보지 말라는 뜻일까. 그럴 리는 없다. 스타인버그는 얼굴이 그려진 종이봉투를 뒤집어쓴 초상을 오래전부터 만들어 왔다. 다만, 이번에는 종이봉투 대신에 손바닥에 자기 얼굴을 그렸을 뿐이다.

손바닥 위의 얼굴이 자화상일까, 아니면 얼굴이 그려진 손바닥을 내미는 모습이 자화상일까. 이것은 일기에 적힌 사람이 나 자신일까, 일기를 적는 사람이 나 자신일까, 라는 질문과 같다. 둘 다 나 자신이다. 내 이미지를 만들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나”이면서, 내가 만들어 낸 이미지가 곧 “나”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둔 스타인버그는 마지막 자화상을 통해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표현과 무관한 순수한 자아 같은 건 없어요. 표현하는 것, 표현되는 것, 둘 다 나예요. 진정한 내 모습은 내 얼굴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표현해 온 내 손에 있어요. 내 손바닥에 뭔가 심각해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녀석이 보이죠. 그게 바로 나예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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