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인환을 다시 만난 후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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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리고 살았다.
한 시절 내 삶의 소중한 일부라고 믿었던 어떤 것을, 아끼고 보듬던 장소를, 선망했던 시와 그림과 예술가를, 시효 지난 복권 종이 날리듯 놓아버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살아왔다는 자각이 들 때 매우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진다.
마리서사를 드나들며 한때 박인환과 교유한 시인 김수영이 '그처럼 시인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고 쓴 문장을 접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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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리고 살았다.
한 시절 내 삶의 소중한 일부라고 믿었던 어떤 것을, 아끼고 보듬던 장소를, 선망했던 시와 그림과 예술가를, 시효 지난 복권 종이 날리듯 놓아버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살아왔다는 자각이 들 때 매우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진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의 기획전시 '망우동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불현듯 그런 자각과 맞닥뜨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몇 년간 시인 박인환을 몹시도 좋아했다. '여학생'이라는 잡지에서 박인환의 시와 그의 생애를 다룬 기사를 눈여겨 읽은 직후부터인 것 같다. 그의 시선집을 외우다시피 했고, '목마와 숙녀'에서 다소 낭만적인 시어로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알고 싶어서 충북 청주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 몇 날 며칠 울프의 작품과 삶에 관해 쓴 책들을 빌려 읽었다. 특히 열아홉 살 박인환이 서울 종로 인사동 초입에 열었다는 책방 '마리서사'의 뒷이야기는 불안한 10대 시절을 통과하던 나의 감성을 마구 흔들었다.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3년 만에 서점을 접고 만 현실은 귓등으로 흘린 채 책방 이름의 모태가 된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다. 잡지에서 오려낸 로랑생의 파스텔톤 인물화를 코팅해 책갈피로 쓰고, 그녀의 연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이별 직후 썼다는 시 '미라보 다리'를 달달달 암송했다. 돌이켜 보면 코코 샤넬의 삶을 눈여겨보게 된 것도, 발음조차 낯선 아방가르드 예술을 찾아 읽은 것도 다 박인환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뻗어 나간 호기심과 허영의 산물이었다.
불같던 열정은 열여덟 살 즈음에 푹 꺼져버렸다. 마리서사를 드나들며 한때 박인환과 교유한 시인 김수영이 '그처럼 시인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고 쓴 문장을 접한 후였다. 김수영이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든, 그토록 절절하게 읽히던 박인환의 시들이 유럽 작가를 흉내 낸 모조품으로 여겨지고, 댄디 보이의 전형 같던 그의 행적도 어딘가 미심쩍은 겉치레로 보인 건 다 그 말의 영향이었다.
그 시인 박인환의 묘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고 했다. 거기 '근심 잊은(忘憂) 땅'에 묻힌 첫사랑의 묘지에 다녀와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라고 읊조리던 박인환이, 지금은 망우역사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묘역에 잠들어 있다는 걸 왜 나는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봄꽃 무성한 묘역의 풍경과 서른한 살에 죽은 박인환의 흑백사진이 오버랩되는 순간, 오래된 기억과 생생한 부끄러움이 한데 엉켜 이상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전시실을 나서자마자 시인 박인환을 검색했다. 어느 출판사에서 그의 시와 수필집을 꾸준히 내고 있었다. 고향 강원 인제에는 박인환 문학박물관이 들어섰다고 했다. 인적 드문 박물관 귀퉁이에 앉아서 성장단계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참으로 소중했으나 너무 쉽게 잊은 존재들. 푸시킨과 앙드레 지드, 생애 첫 담임선생님과 초등학교 6년을 붙어 다닌 친구, 산수유꽃 만개하던 중학교 뒷산과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들… 언 땅 녹고 봄꽃 필 때 박인환의 묘지에 꼭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눈보라'와 '좁은 문'도 다시 찾아 읽으리라.
하마터면 많은 것을 놓쳐버릴 뻔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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