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법리 오해’ 논란 낳은 대법원 판결문
“피해자 진술, 성인지적 관점으로 봐도 인정할 수 없다”
법조계 “법리가 문제인 듯 해석…여성 대법관 필요”
대법원이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견지하더라도 피해자 진술에 따라 무조건 피고인을 유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아 법원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성범죄 재판에서 이른바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곤 해 2018년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세웠는데, 이번 판결은 이 법리를 오해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원심이 유죄로 판단한 사건을 지난 4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피고인이 지하철에서 여성 피해자에게 신체 접촉을 해 기소된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에게 ‘추행의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대법원 2부는 피고인이 자폐성 장애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체 접촉을 했을 수 있다며 추행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그러면서 2018년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가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한 판결을 거론한 대목이다. 이 판결은 성범죄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형사사건에 적용한 첫 대법원 판결이다.
대법원 2부는 이 판결에 대해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하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 “성범죄 피해자 진술에 대해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보더라도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타당성뿐만 아니라 객관적 정황, 다른 경험칙 등에 비춰 증명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며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됐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법원 안팎에선 대법원 2부의 이번 판결을 두고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오해한 ‘허수아비 논증’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성인지 감수성 법리는 ‘성범죄 피해자는 으레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피해자다움이 성범죄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데,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마치 이 법리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조윤희 변호사는 21일 “성인지 감수성 법리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피해자다움의 편견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고 피해자의 말로만 유죄를 인정하라는 취지도 아니다”라며 “이번 판결이 피해자 진술로 유죄 판결을 선고할 수 없다고 이해될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번 판결이 성범죄 피고인들의 논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형사소송의 대원칙임을 감안할 때 어떤 점을 유의해서 심리해야 하는지를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 판결”이라며 “기존 입장에 제동을 걸었다거나, 다른 판단의 시발점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번 판결은 민유숙 대법관이 퇴임한 뒤 여성 대법관이 한 명도 없는 소부에서 선고됐다. 이를 두고 젠더 사건 등에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는 여성 대법관의 필요성을 또다시 보여주는 사례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혜리·강은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프고 계속 커지는 켈로이드 흉터··· 구멍내고 얼리면 더 빨리 치료된다
- “남잔데 숙대 지원했다”···교수님이 재워주는 ‘숙면여대’ 대박 비결은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윤 대통령 골프 라운딩 논란…“트럼프 외교 준비” 대 “그 시간에 공부를”
- ‘검찰개혁 선봉’ 박은정, 혁신당 탄핵추진위 사임···왜?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그는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다” 1인 시국선언한 장학사…교육청은 “법률 위반 검토”
- 3200억대 가상자산 투자리딩 사기조직 체포… 역대 최대 규모
- 머스크가 이끌 ‘정부효율부’는 무엇…정부 부처 아닌 자문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