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사나이’의 퇴장
88올림픽을 앞두고 한 화장품 회사가 만든 남성용 스킨로션의 광고 모델은 차범근이었다. 웃통을 벗어던진 근육질 몸매로 사나이다움을 강조했다. 그런데 10년도 못 갔다. 1990년대 인기를 끈 화장품 브랜드가 선택한 모델은 안정환과 김재원 같은 꽃미남이었다. 안정환은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넘겼고 귀고리까지 했다. 2000년 대 들어 ‘남자는 피부다’처럼 여성 느낌의 카피가 등장하더니, 최근엔 색조 화장에 립스틱까지 손에 들고 나온다. 사나이다움의 퇴장이다.
▶사나이는 ‘한창 혈기 왕성한 남자’라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용맹한 남자들이 간다는 특전사가 10년 전 군가 ‘검은 베레모’ 후렴에 나오는 ‘아아, 검은 베레, 무적의 사나이’에서 ‘사나이’를 ‘전사들’로 바꿨다. 몇 해 전 입대하는 아들을 배웅하러 논산 훈련소에 갔더니 울려퍼지는 ‘육군가’가 귀에 익지 않았다. 들어보니 ‘화랑의 핏줄 타고 자라난 남아~’에서 ‘남아’가 ‘우리’로 바뀌어 있었다. 여군 비율이 이미 10%에 육박하고, 2027년엔 15%까지 늘게 되는 현실을 가사에 반영했다고 한다. 어쩌면 국군의 대표 군가인 ‘진짜 사나이’도 가사에서 사나이가 빠지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사나이’가 나오는 유명한 광고가 농심 신라면이다. 1986년 제품을 선보이며 매운맛을 강조하기 위해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를 쓴 것이 시초다. 라면왕으로 불리던 신춘호 창업주가 직접 달았다. 광고 모델도 코미디언 구봉서부터 최수종·송강호·송일국·유해진·박지성·하정우 등 대부분 남자였다.
▶38년 동안 쓴 신라면 카피가 이번 주부터 ‘인생을 울리는 신라면’으로 바뀌었다. 2019년 손흥민이 모델로 나왔을 때 ‘세계를 울리는 신라면’을 잠시 쓴 적은 있지만 이번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도 매운맛에 운다’든가 ‘남자는 울면 안 되느냐’는 항변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광고 카피에 반영된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조차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봐야 했다. ‘울지 않는 한국 사나이’ 이미지가 매력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에서 일었던 한류 드라마 바람은 약해 빠진 ‘초식남’에 질린 일본 여자들이 씩씩한 한국 사나이에 매료된 덕이 컸다. 어느새 한국 남자들도 초식남이 되어가고 있다. 취업난으로 위축되고 내 집 마련조차 힘든 시대의 부담이 젊은 남성들을 위축시킨 탓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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