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대표를 다시 생각한다

기자 2024. 1.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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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어느 더운 날, 국회에서는 전국에 소재한 1500여곳의 집단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2만8000명을 지역사회에서 어울려 살도록 전환하는 탈시설 정책을 추진하면 예산이 얼마나 소요될지 가늠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여섯 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축사를 전하거나 직접 참여했다. 이들의 소속 정당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으로 다양했던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한결같이 ‘초선’의 ‘여성’ ‘비례대표’ 의원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삶들을 위한 세미나에 축사를 보낸 이들 역시 그리 주류는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의 입법부는 지역구 의원 253석과 비례대표 의원 47석으로 구성된다. 근간은 지역구제이고, 비례대표제가 보완적으로 도입된 셈이다. 그런데 지난 21대 국회의원선거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따른 위성정당 논란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래서인지 2023년 봄 전개된 비례대표 의석 확대 논의는 여론의 반대에 직면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내 손으로 뽑은” “○○의 아들/딸”을 원한다.

비례대표제가 역사적으로는 사표가 다수 발생하는 소선거구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제도 정도로 논의가 되었고, 현실적으로는 정당의 리더들과 정치적 명사들을 위한 불투명하고 하향적인 ‘안배’의 장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지역을 넘어 사회 전체로 볼 때 과소대표되는 소수 집단이 국회에서 대표될 수 있도록 정치적 대표성을 확장하는 제도로 기능하기도 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비례대표제는 청년, 장애, 여성, 노동, 이민자 등 당시의 시대적 가치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신인들의 등장 무대이기도 했다. 동시에 퇴장 무대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균열 지점들을 생각해본다. 그것이 과연 꼭 지역구의 모습을 한 경계들인가? 아니면 노동과 자본, 비수도권과 수도권, 비정규직과 정규직, 장애와 비장애, 여성과 남성, 미래 세대와 현세대, 자연과 인간, 죽은 자와 산 자 같은 광역적 이슈들인가? 지역의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얻어야 하는 현 시스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이들이라면 과연 이런 정치적 이슈들을 적절히, 즉 단지 이성과 전문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경험에도 기반하여 다룰 수 있는 최선의 대표자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정치적 균열의 한쪽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균열들을 기꺼이 횡단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집단 간 통합을 이루어낼 의지와 역량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갖추었다면, 그것이 발휘된 결과물이 충분히 있는가?

해나 피트킨에 따르면 대표란 그곳에 있지 아니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그곳에 ‘있게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대표의 본질과 현재 한국의 현안들을 함께 고려해보면 우리에게는 지역 기반이 아닌 이슈 기반, 영역 기반의 대표들도 절실히 필요하다. 이를 반드시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간 양자택일의 문제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비례대표제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제도는 늘 왜곡되고 우리를 실망시킨다. 중요한 것은 대표되어야 할 이들이 대표되는 것이다. 정략보다는 정책으로 말하고,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자리가 익숙하며, 능수능란함보다는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지역적 관점보다는 광역적 관점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이 여의도에, 언론에, 그리고 대한민국의 법전에 좀 더 기록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상적 대표행위를 위해 정치인 개인의 덕성과 용기를 요청하고 싶지 않다. 의식적으로 당신과 다른 존재를 대표하라고, 그들에게 손 내밀라고 요구할 것 없이, 그저 그 세계를 실제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직접 자신을 대표할 기회가 최소한이라도 보장되면 된다. 거기서 출발하면 된다.

흔히 인용되는 성서의 구절이 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대표이다. 우는 자들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넘어서, 그 존재 자체가 함께인 것이 대표이다.

장애인 탈시설 정책 세미나에 축사를 보낸 여섯 명의 초선 여성 비례대표 의원들을 보았던 날,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더 많은 정치인(아마도 그 자신 오래 울어왔던 사람이리라)의 출현을 기대했다. 총선을 앞둔 지금 역시나 의석수 늘리기에 휩쓸려버린 선거제 논의를 보며 놀라지 않으면서도, 우는 자들이 이 나라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기에 여기 언어로 기록해둔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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