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누군가는 종말 직전에도 회사에 간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를 보기 시작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시리즈가 쏟아지는 와중에 조용히 등장한 이 작품은 언뜻 재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기엔 좀 시시하다. 대재앙의 스펙터클도 없고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지도 않는다. 몇 사람의 하루일과를 담담히 응시할 뿐. 하지만 나는 이 시시함이 믿음직스럽다.
나를 잃는 고통, 나를 찾는 고통
여타의 픽션처럼 캐럴의 지구도 종말을 앞두고 있다. 지구를 절멸시킬 행성의 이름,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모두에게 딱 반 년이 남았다. 그러자 유례없는 시대정신으로 세상이 물든다.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것. 인류는 행복만이 유일한 윤리인 듯 생활을 바꾼다. 삶의 마지막 쾌락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가족과 이웃을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다. 그들은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고, 못 가본 나라를 여행하고, 나체로 파티에 가고, 금기였던 사랑에 올인하고, 신호에 구애받지 않은 채로 차를 몬다. 그러나 인생을 즐긴다는 게 대체 뭘까? 우리의 주인공 캐럴은 도통 모르겠다.
다들 카르페 디엠에 열을 올리자 캐럴 역시 즐거움에 대한 압박을 느낀다.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요즘 서핑을 한다고 대답해버린다. 서핑으로 대표되는 자유와 멋, 운동 능력, 대자연과의 교감 등 멋진 가치들을 어필할 수 있어서다. 이때 캐럴의 눈동자는 자꾸만 구석을 향한다. 거짓말이므로. 사실 캐럴은 평소처럼 회사에 다닌다. 기이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종말이 반 년 남은 세상에서 출퇴근은 이미 과거의 산물이다. 대다수가 일을 때려치우지 않았겠는가. 화폐는 기능을 잃고 생계를 위한 노동의 당위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어떤 조직은 아랑곳하지 않고 운영된다. 회사 하면 떠오를 법한 사무실. 캐럴처럼 새로운 행복에 경도되지 않는 이들이 거기서 일하며 안정을 느낀다.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체계, 답답하리만치 보수적인 시스템에서 평화를 얻는 이도 있다. 그러나 회사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부품화하고 대체 가능하게끔 만든다. 네가 꼭 너여야 할 필요는 없단 의미다.
그건 회사의 입장이고 캐럴은 옆자리 직원의 이름이 궁금하다. 매일 커피를 나르는 직원의 이름도 궁금하다. 같이 일하는 이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래서 사무실 구석에 방치된 직원 명부를 보며 사람들 이름을 외운다. 캐럴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흠칫 놀란다. 부품 이상이 될 때의 작은 고통을 느껴서다. 호명은 자신에게 자신을 돌려주는 힘을 지녔다.
말세에도 존엄할 수 있을까
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던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수인번호는 174517이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레비는 자신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었다.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 수용소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당신들 집에서 겪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나는 상상한다. 80년 전 쓰인 레비의 메시지를 캐럴이 듣는다면? 캐럴은 자유로운 인간인 채로 집과 회사를 오간다. 레비가 겪은 세상과 판이하지만, 살아서도 인간성의 죽음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비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캐럴에게 유효해보인다. 종말 때문에 외려 가벼워진 존엄의 문제를 얼떨결에 마주하게 된다.
옷깃만 몇 번 스친 직장 동료가 죽던 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시신이 캐럴의 눈에 밟힌다. 이름과 얼굴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 왔잖아요. 이 회사에 매일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리 모두가 하듯이요.” 고인의 가족을 찾을 수 없으므로 캐럴은 직접 장례를 치러주기로 한다. 회사 옥상에서 유해를 날릴 때 캐럴과 동료들은 고인에 대해 아는 만큼만 말한다. 당신은 콧수염이 있었다고, 스테이플러를 빌려가면 꼭 돌려주는 사람이었다고, 당신의 도시락 냄새는 참 좋았다고…. 이렇게 사사로운 정보들이 그의 삶을 일부 나눠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끌어당긴다. 아마도 삶을 너무 아껴서일 것이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곧 삶을 다루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구경하는 사회, 죽어도 잘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 이런 책과 드라마를 마주하면 뭔가가 사무친다. 이 사무침을 레비에 대한 서경식 교수의 문장으로 설명하고 싶다. 내 마음은 “인간성에 대한 이유있는 절망과 힘겨운 기대로 가득 찬”다. 종말 직전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강령이 이것이라면 좋겠다. 나만큼이나 당신이 귀하고, 당신만큼이나 내가 귀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것. 알 뿐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살 것.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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