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한 고전문헌 탐구 강조로 원전 번역 토대 쌓으셨죠”

한겨레 2024. 1. 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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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30주기 맞는 박홍규 선생을 기리며

고 박홍규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민음사 제공

해방 후부터 서울대 교수 재직하며
고전문헌 접하는 법 지도에 열정
원전 번역 요약물에 석·박사 학위 줘
철학과 동료 교수들과 갈등도


후학들 스승 뜻 따라 정암학당 열고
독회·토론 통해 고전 번역 확장
스승 별세 때 제자들 직접 ‘염’까지
최근 생애 엿볼 수 있는 책 나와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태어나서 1994년 3월9일 돌아가신 박홍규 선생님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시련, 굴곡과 함께였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수학해 서양 고전 철학의 기틀을 다지고, 해방된 이듬해 서울대 불문학과를 거쳐 철학과 교수로 취임해 1984년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후 10년의 수를 더하셨을 뿐이니 더 사셨으면 얼마나 많은 철학적 사유의 축복을 받았을까 아쉬울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고전 문헌의 천착과 대화를 통한 강의에 몰두하셨을 뿐, 저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선생님 사후 제자들은 선생님의 글을 모은 한 권의 논문집과 네 권의 강의록으로 이루어진 ‘박홍규 전집’(민음사)을 1995년부터 2009년에 걸쳐 출간하였습니다. 2015년에는 선생님 철학에 관한 연구서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이태수, 윤구병, 이정우 등 공저)가 나왔고 지난해 말에는 선생님 삶의 모습도 엿볼 수 있는 ‘박홍규 철학의 세계’(이태수, 최화, 기종석 등 공저)가 출간되었습니다.

고 박홍규(뒤 왼쪽 넷째) 교수 등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1970년대 초 찍은 사진이다. 뒤 맨 왼쪽이 필자 기종석 교수이다. 기종석 교수 제공

대학을 입학한 지 반백 년이 넘었으나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와 그 이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그 우중충하고 비끗거리는 동숭동 강의실에서 두꺼운 책 몇 권을 교탁에 펼치고 바로 강독에 들어가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출석도 부르지 않고 서론도 없이 학생들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선생님은 책 읽기에 매몰되셨습니다. 막히거나 불분명하면 펼쳐놓은 주석서를 뒤적거리며 비평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학생들에게 “그래, 그래, 그렇지?” 하시며 동의 아닌 동의를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진도는 아예 염두에 없었으니, 선생님이 시작하시면 개강이고 리포트 하나 내라 하시면 종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바로 그 강의에서 받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학자는 바로 선생님 같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르치기보다는 텍스트를 접하는 법과, 읽고서 대상의 진상에 이르는 탐구의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엄혹하고 암담하던 시절에.

대학원 신입생에게는 강독의 책무를 주기 때문에 일주일이 어찌 지나는지 모르게 지났습니다. 강독자는 강의를 여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지만 개인으로서는 원전에 대한 입문 방법을 습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석사와 박사 과정 모두 원전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려면 먼저 플라톤 원전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이 대학원에서 강독한 플라톤 대화록의 정리가 곧 석사 학위였고 박사 학위였습니다. 대화편 한 편 읽고 요약한 것이 어떻게 학위논문이 될 수 있느냐는 동료 교수들의 질책에도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철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에요.” 고전 문헌 자체의 엄밀한 천착은 선생님의 학문적 방법이자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은 지금 정암학당으로 이어져 고전을 전공하는 젊은 학자들의 독회와 토론을 통하여 플라톤 철학을 위시한 또 다른 고전 철학의 전적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은퇴한 뒤에는 한 학기에 한두 번 날짜를 정하여 선생님의 모든 문하생이 모였습니다. 이른바 ‘박홍규 사단’이 회동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셨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를 자유롭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몹시 체계적인 강의였습니다. 이제 그 강의록이 전집에 수록되었으니, 그것이 선생님의 존재론과 형이상학 이해를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고인의 제자들이 2015년 묘소를 찾았을 때 찍었다. 맨 왼쪽이 기종석 교수. 기종석 교수 제공

선생님의 아호는 소은(素隱)입니다. 동료 교수이던 윤명로 선생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자신이 숨거나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는 선비쯤으로 불리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야를 방해하는 숲속에서 하는 철학이나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는 철학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항상 데이터(Data)와 프라그마(Pragma·데이터의 그리스어 대응어)를 강조하시고 실증주의를 옹호하며 관념론을 배척하신 점이 선생님 사상을 추적하는 단서가 되겠지요. 데이터들을 외면하고 관념 안에 노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상을 보되 한 면으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이데아를 설명하실 때도 인간은 저 뒷면을 보지 못하니 돌려봐야 하고, 돌려 볼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자유에 관한 논의도 한 측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 본질론적 측면에서 보면 자유의 극치는 모든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벗어난 ‘영원한 무감동’에서 성립할 것이나, 생명의 측면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타성을 벗어나 모든 사물과 관계 맺음에서 성립한다고 논파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선생님 철학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 어찌 한 줄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까만 제자들이 힘써서 선생님의 글과 강의 내용을 모아 전집으로 묶었으니 후학들의 탐구와 사유에 의해 밝혀지고 성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출간된 ‘박홍규 철학의 세계’ 표지.

올해가 선생님 가신 지 30년입니다. 그날 선생님이 가셨다는 소식에 제자들이 모여 직접 염을 하였고, 제자들이 찾아낸 공원에 묘비명을 세워 모셨습니다. 해마다 새봄이 시작하는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선생님을 만나던 양지바른 그곳, 삼십 년 머무셨으니 이제 그곳도 떠나야 한답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은 원래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선생님이 남기신 가르침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원하십니다.

기종석/건국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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