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정치인' 처단할 사람은 당신"…말 한마디로 돌풍 일으킨 정치인[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전 신념을 지킬 겁니다. 반드시 그럴 거에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킬 거에요."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시 재정관으로 근무하는 윌리 스탁은 어느 학교 건물이 붕괴된 이후 일약 스타로 떠오릅니다. 학교 부실 공사로 학생 3명이 사망했는데, 윌리가 이전부터 공사 관련 입찰 비리를 폭로해왔기 때문이죠. 그의 양심적인 행동이 나중에서야 알려진 겁니다.
어느 날 도시 남성들이 그를 찾아와선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슬로건을 띄울 수 있다며 그를 설득하죠.
“부패한 세력과 맞서 싸운 윌리 스탁. 학교 사고를 이미 경고해왔던 윌리 스탁.”
정의에 불타 있는 윌리는 이 제안을 덥석 뭅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크게 호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에게 선거 출마 제의를 한 사람이 사실 조 해리슨 후보 쪽 측근이었다는 겁니다. 도시 출신의 해리슨 후보가 라이벌 후보인 시골 출신 맥 머피 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농촌 출신인 윌리에게 의도적으로 출마를 제안했다는 겁니다.
분노에 치민 윌리는 연설장에서 사고를 칩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예 까발린 거죠. 그러면서 이러한 정치인들을 '처단'해야 한다며 호소합니다.
"투표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그럼 도시 사람들이 말하는 멍청이가 되는 겁니다. 이 기생충들을 처단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는 빈곤층을 위한 무상교육과 도로·교량 건설 공약으로 농촌 표심도 제대로 공략합니다. 그의 솔직하고 호소력 있는 태도에 대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윌리는 결국 주지사로 당선됩니다. 그것도 주지사 선거 역사상 최다 표차로 말이죠.
그러나 주지사의 삶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를 당선 시킨 건 비(非)기득권자들이었지만 정치판에서 그를 움직이는 건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이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돈줄은 모두 기득권층이 잡고 있었습니다.
"권력이란 시민들의 손에 있으며, 그들이 나에게 권력을 위임해주었어요."
윌리가 신념 하나로 꿋꿋하게 저소득층을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자 기득권층은 그를 탄핵할 준비에 나섭니다. 주에서 명성 높은 어윈 판사마저도 윌리의 탄핵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죠. 탄핵 위기에 몰린 윌리는 자신의 비서로 영입한 기자 출신 잭에게 지시를 하나 내립니다.
"잭, 누구 뒤 좀 캐줘야겠어. 사자를 꺾어버리면 다른 동물들은 알아서 기게 마련이지...인간이란 존재는 죄악과 더러움으로 만들어졌으니 이는 기저귀의 똥냄새에서 수의의 악취까지 계속된다. 무엇이든 찾아내. 끝까지 달라붙어."
어윈 판사의 뒤를 캐라는 지시에 잭은 난감합니다. 어윈 판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에게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던 대부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잭 역시 신념 하나로 결국 어윈의 약점을 찾아냅니다. 이에 어윈 판사는 입장을 철회하기 보단 목숨을 포기합니다.
윌리는 점점 변질되어 갑니다.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전 주지사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전 주지사 딸인 앤에게 장학금을 주고 아들 조에겐 윌리의 이름을 딴 대형 병원의 운영을 맡깁니다. 앤은 잭의 첫사랑이었고 조는 그의 절친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윌리는 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주지사가 된 이후 이미 수 차례 불륜 상대를 바꾼 후였죠. 조를 병원장으로 영입하려는 것 역시 병원에 윌리의 비자금을 숨겨 놓고선 이것이 발각될 시 그에게 죄를 덮어 씌우기 위한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윌리는 어느 새 기득권층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순수했지만 점점 변질됐죠. 그 역시 순수한 이들을 이용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탄핵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윌리. 그는 과연 탄핵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2006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올 더 킹즈 맨'(All the King's Men) 입니다. 1946년 실화 바탕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1949년에 나온 동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죠.
영화는 순수하게 정치에 뛰어든 윌리가 부패한 정치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숀 펜, 주드 로, 케이트 윈슬렛, 마크 러팔로, 안소니 홉킨스 등 명배우들의 연기가 이러한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해주죠.
우리나라 정치판에도 윌리처럼 순수하게 발을 들인 정치인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국민에게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계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9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16∼18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 대상)에 따르면, 윤 대통령 직무 수행을 긍정 평가한다는 응답은 32%에 그쳤습니다. 여야의 지지율 역시 30%대에서 답보하고 있습니다.
성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도 정치를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과 교육정책 네트워크가 21일 발표한 '2023 교육정책 인식 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의 직업별 신뢰도에서 정치인과 대통령은 각각 23.4%, 22.7%로 가장 낮았습니다.
신뢰도를 4점 척도로 매겨 달라는 질문에서도 '정치인'은 2.05점, '대통령'이 1.99점으로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인플루언서'(2.23점)보다도 낮았죠.
어쩌다가 우리 정치인들은 인플루언서보다도 믿지 못할 존재가 됐을까요?
정치인들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의 결집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상대 진영을 자극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공약도 막무가내로 내놓고 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기존 여야 진영에 희망이 없다며 탈당하고 제3지대를 구축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희망보다는 염증을 느낍니다.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기 때문이죠.
여러 제3지대 가운데 일부는 서로 간의 연대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서로 총을 겨눴던 이들이 '탈당'이라는 공통 분모 하나로 뭉쳐서 아무 탈 없이 공생할 수 있을 지, 희망보단 의구심이 더 큰 상황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공격에만 골몰하며 이리저리 갈라지는 정치판을 보면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깁니다.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이죠. 도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 사시는지요.
윌리는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마치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처럼 말이죠.
"사람이 무언가를 너무 간절하게 원하면 그 욕망 그 자체가 되어서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잊어버리곤 하지."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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