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아준 정권에 ‘청부민원’ 화답했나…“방심위 위상 회복 불가”

최성진 기자 2024. 1. 2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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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한국방송회관 방심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2008년 기구 설립 이래 최대 위기에 놓였다. 야권 추천 심의위원 5명 무더기 해촉, 윤석열 대통령 비판 보도를 겨냥한 긴급심의 남발,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인터넷 언론 심의 논란에 더해 류희림 위원장을 둘러싼 ‘청부 민원’ 의혹까지 방심위는 지난 넉달여 동안 유례없는 잡음을 빚으며 파행을 거듭했다. 모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가깝게는 지난해 9월 윤 대통령이 류 위원장을 내리꽂은 뒤 벌어진 일들이다. 언론학계와 언론·시민사회단체는 민간 독립기구로 출범한 방심위가 존재 이유를 잃고 정권의 언론 검열·통제기구 노릇을 하고 있는 만큼, 위원회 구성 변경을 포함한 전면적 개편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류희림 방심위 체제의 문제를 극명하게, 또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안은 청부 민원 논란이다. 류 위원장이 자신의 가족과 평소 알고 지낸 이들을 동원해 일부 방송사 뉴스를 심의해달라고 방심위에 민원을 넣도록 한 뒤, 본인이 직접 이를 긴급심의 안건으로 심의해 과징금 등 중징계를 때렸다는 게 논란의 얼개다.

방심위를 거쳐 간 많은 언론계 인사들은 이번 청부 민원 논란이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문제투성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윤 대통령에 의해 해촉된 정연주 전 방심위원장은 “과거 정치권에서 방심위에 쏟아낸 정당 민원도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었으나, 적어도 문제제기의 주체가 숨지는 않았다”며 “류 위원장의 가족 등이 동원된 청부 민원은 여권이 표적으로 삼은 방송 보도에 대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집중적인 민원을 제기했다는 것 자체는 물론 그걸 신속심의(긴급심의)라는 매우 비정상적 형태로 진행한 것, 과징금이라는 광적인 과잉 심의를 남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와 언론 자유를 크게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4기 방심위(2018년 1월~2021년 1월) 위원을 지낸 김재영 한국언론정보학회장도 “(청부 민원에는) 악의적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고, 이런 심의가 가능하다면 방심위는 정권 차원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특정 보도 및 방송사를 찍어내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라며 “이번 논란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방심위가 추락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짚었다.

방심위 내부의 익명 제보자가 지난달 23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낸 ‘비실명 대리 신고서’를 보면, 류 위원장 청부 민원 논란의 시작은 지난해 9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검찰이 9월1일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 보도와 관련해 신학림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을 압수수색했다. 사흘 뒤 이동관 당시 방송통신위원장은 국회에서 이 보도를 ‘중대 범죄이자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하고 뉴스타파를 인용 보도한 다른 방송사에 대해서는 “수사와 별개로 방심위를 통해 엄중 조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이튿날 성명을 내어 이를 ‘희대의 대선 공작 사건’이라며 날을 세우는 등 논란을 이어가기 위한 여권은 노력은 한동안 계속됐다.

방심위에 뉴스타파 인용보도를 심의해달라는 민원이 쏟아진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제보자는 신고서에서 이동관 전 방통위원장의 ‘방심위 통한 엄중 조치’ 발언 당일인 9월4일부터 18일까지 160여건의 뉴스타파 인용보도 관련 심의 민원이 방심위에 접수됐는데, 그중 10건이 류 위원장의 동생·아들과 그가 몸담았던 미디어연대 대표가 제기한 민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민원인 현황 및 오탈자까지 비슷한 민원의 내용과 구조 등을 종합하면, 전체 민원의 절반 이상인 100여건이 류 위원장의 사적 이해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 40여명이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덧붙였다.

류 위원장 가족·지인의 민원은 결과적으로 방심위가 뉴스타파 인용보도 관련 안건의 긴급심의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방심위는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통상 민원 접수 순서대로 심의를 진행하는데 해당 안건 처리는 달랐다. 방심위 회의록을 보면, 9월5일 방송소위에서 여권 추천 허연회·황성욱 위원은 “어제 국회에서 난리가 났다”며 뉴스타파 관련 안건에 대해 “민원이 들어오는 즉시 긴급심의를 해달라”고 주문하고 결정했다.

이들 민원이 류 위원장의 ‘청부’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직접적 근거는 아직 없다. 류 위원장 본인도 지난 19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가족·지인의 집중적인 민원 제기 사실에 대해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주장을 거듭 폈다.

이와 달리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심위지부 등 방심위 내부와 민주언론시민연합을 비롯한 언론·시민단체는 청부 민원 논란이 과거 검사 시절 윤 대통령의 수사 무마 의혹을 다룬 보도를 겨냥해 류 위원장을 중심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고 보고 있다. 이들 단체는 지난 18일 류 위원장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며 “류 위원장은 다른 방심위 위원들이 ‘류 위원장 사주 민원’을 진정한 민원이라고 오인·착각하게 해 긴급심의 안건으로 올려 심의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현판. 방심위 제공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를 비롯한 여권 핵심 인사가 앞다퉈 ‘대선 공작 사건’ ‘국기문란’이라고 낙인찍은 보도를 최대한 신속히 심의할 수 있게끔 심의기구 수장이 나서서 민원을 청부했다는 것이 논란의 한 축이라면, 사적 이해관계자로부터 제기된 민원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는 류 위원장이 관련 안건을 회피하기는커녕 초유의 중징계로 이어진 심의·의결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번 사건의 또 다른 축이다.

지난해 8월 위원으로 위촉된 류 위원장은 위원장으로 호선된 9월8일 방송심의소위(방송소위)로 건너와 방송소위의 여야 구도를 3 대 2로 만들었다. 이어 류 위원장은 9월12일 방송소위 회의에서 관련 민원이 들어온 게 있는지 확인한 뒤 추가 긴급심의를 결정했다.

바로잡을 기회도 있었다. 권익위 신고서를 보면 9월14일 뉴스타파 인용보도 안건과 관련해 류 위원장의 친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민원이 접수됐다는 보고가 위원장한테 올라갔고, 같은 달 27일 류 위원장이 해당 안건을 회피해야 한다는 지적이 방심위 공개 게시물의 형태로 제기됐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동생의 민원 취하와 게시물 삭제 요청이었다. 뉴스타파 인용보도에 대한 잇단 긴급심의는 지난해 11월13일 방송사 4곳에 1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물리는 결정으로 이어졌고, 류 위원장은 이를 내내 주도했다.

방심위 내부와 법조계에서는 류 위원장의 이런 행위는 ‘방심위 임직원 이해충돌 방지규칙’(4조)과 이해충돌방지법(5조)을 위반한 행위라고 보고 있다. 언론학계에서는 청부 민원 논란이 법 위반을 넘어 방심위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류 위원장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 지적한다.

2기 방심위(2011년 5월~2014년 5월) 위원이었던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방심위는 누구나 아무런 부담 없이 대한민국 세금을 이용해서 방송에 대한 검열을 가할 수 있는 구조로 민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며 “류 위원장은 이런 구조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려고 한 것이고,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심위를 통해 대통령의 비리 여부를 다룬 뉴스타파 인용보도 방송사를 징계하는 모습을 만들어내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부 민원 논란이 불거진 뒤 류 위원장과 대통령실이 취한 태도도 문제로 지적된다. 류 위원장은 청부 민원 논란이 불거지자 이를 민원 신청인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규정하고 검찰에 제보자 수사를 의뢰했다. 청부 민원 논란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야권 김유진·옥시찬 방심위원에 대해선 욕설 등을 이유로 해촉을 결정했다. 윤 대통령은 해촉 건의안을 곧바로 재가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추천 몫으로 위촉된 정연주 위원장과 국회의장 추천 이광복 부위원장을 근태 불량 등을 이유로 해촉한 데 이어 9월에는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논란을 근거로 들어 정민영 위원마저 해촉했다. 여기에 이번에 해촉된 두 위원까지 모두 5명의 야권 추천 위원을 약 5개월 만에 밀어낸 것이다. 그사이 윤 정부 출범 이후 기존 위원의 임기가 끝나지 않아 여야 3 대 6 구도가 유지됐던 방심위는 현재 4 대 1로 뒤바뀌었다. 옥시찬 전 위원은 “정연주 위원장 해촉 때부터 자기들의 큰 죄는 덮고 야권 위원들의 작은 죄는 키워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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