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로 이루고 싶은 게 뭔가” 클레멘테가 남긴 유산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34년 8월18일, 푸에르토리코엥서 사탕수수 공장을 감독하던 이의 일곱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형제들은 종종 아버지를 도와 물건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을 했다.
클레멘테는 야구선수가 되기 이전에 육상에서 먼저 재능을 보였다. 고교 시절 높이뛰기와 창던지기에 두각을 나타냈고, 올림픽 출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야구였다. 창던지기 경험은 훗날 그가 야구를 할 때 물리학적으로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클레멘테의 우상은 몬테 어빈이었다. 어빈은 메이저리그에 모습을 드러낸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겨울을 보내며 산후안 세너터스 소속으로 경기를 뛰었는데, 클레멘테와 친구들은 그의 가방을 들어주는 대신 무료로 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어빈은 늘 친절하던 클레멘테에게 공과 장갑을 선물하기도 했다.
야유가 쏟아져도 “나는 색깔을 믿지 않는다”
클레멘테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는 브루클린 다저스 스카우트였다. 알 캄파니스 스카우트는 클레멘테를 “내가 본 최고의 운동선수”라 칭하기도 했다. 다저스 구단이 클레멘테에게 제안한 액수는 리그 최저 연봉인 5천달러와 1만~1만5천달러의 보너스였다. 이후 브레이브스까지 참전했다. 브레이브스는 그에게 다저스보다 두 배 많은 3만달러를 제시했다. 클레멘테는 망설이다가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다. 그때 그의 부모님은 먼저 약속한 사람과 계약할 것을 권했다. 그만큼 신의를 중시했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1954년 시작한 미국 생활은 험난했다.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대였다. ‘너무 많은 소수자(흑인)’가 백인 선수와 팬들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경기 출전 기회도 많지 않았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는 클레멘테를 비롯해 흑인 선수들은 별도의 호텔에서 숙박해야 했다.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흑백의 장벽을 깬 뒤 7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러했다.
클레멘테는 1954년 11월22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1955년 4월17일, 라틴아메리카 출신 흑인 야구선수로는 최초로 피츠버그 파이리츠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지역 언론을 비롯해 일부 팀 동료는 라틴아메리카 출신 흑인 선수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어에 서툰데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니 오죽했을까. 타석에 설 때마다 그에게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때마다 클레멘테는 단호하게 “나는 색깔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불어 “나는 자라면서 인종에 따라 누군가를 차별하지 말라고 배웠다”고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스무 살이었다.
신인 시절 그는 오프시즌 때 고향에서 당한 차사고 때문에 여러 차례 경기에 결장했다. 술에 취한 과속 운전자가 교차로에서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허리 통증으로 그는 특정 유형의 공을 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타율 0.255로 루키 시즌을 마쳤다. 프로 2년차인 1956년 7월25일에는 9회말 만루 상황에서 끝내기 인사이드더파크홈런(장내홈런)을 터뜨리기도 했다. 1900년 이후 메이저리그 최초의 기록이었다.
라틴계 유산 무시하는 호칭 단호히 거부
클레멘테가 타격 재능을 꽃피운 것은 1960년 이후였다. 남부럽지 않은 성적으로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1960년)으로 이끌고도 시즌 최우수선수(MVP) 투표에서 8위까지 밀린 것을 안 뒤 이를 더욱 악물었다. 수상은 몰라도 2~3위 정도는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1960년부터 1972년까지 13시즌 동안 단 한 차례(1968년)만 제외하고 3할 이상 타율을 기록했고, 네 차례나 내셔널리그 타격왕(1961년, 1964년, 1965년, 1967년)에 올랐다. 1966년에는 타율 0.357, 23홈런 110타점의 성적으로 리그 최우수선수에 뽑혔고, 수비 기준으로 뽑는 골드글러브는 12년 연속 받았다. 월드시리즈에서는 두 차례 우승했다.
최고 위치에 올랐어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스포츠 기자들은 그를 조금 더 미국인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밥”(Bob) 혹은 “바비”(Bobby)라고 불렀다. 야구카드에도 “밥 클레멘테”라고 쓰였다. 클레멘테는 확실하게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는 인터뷰 동안 기자들이 자신을 “밥”이라 부르면 “제 이름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입니다”라고 바로잡았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서술에 따르면 클레멘테는 자신을 “밥” 혹은 “바비”라고 부르는 것이 푸에르토리코와 라틴계 유산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의 불만에도 인쇄물에 클레멘테를 밥으로 표현하는 관행은 1960년대 내내 계속됐다.
클레멘테는 오프시즌 때마다 남아메리카에서 자선활동을 이어갔다. 서른여덟 살에 통산 3천 안타(역대 11번째)를 기록한 1972년 시즌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2월23일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에 강진이 발생하자, 그는 즉시 응급구조 비행기를 수소문해 의료품과 식료품을 보냈다. 마나과는 그가 3주 전 방문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 차례나 보냈던 구호물품이 부패한 지역 관리에 의해 모두 빼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이 직접 니카라과행 화물수송기에 올라탔다. 그때가 12월31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세 낸 화물기는 기계 결함이 있었고 비행 인력도 부족했다. 너무 많은 짐(1900㎏)을 실은 것도 문제였다. 클레멘테가 탄 비행기는 1973년이 되기 3시간 전 대서양에 추락했고, 그의 주검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새 시즌을 준비하는 야구선수들에게 묻는다
메이저리그는 1973년부터 사회공헌에 이바지한 선수에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한다. 그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뿐만 아니라 미국 해병대 명예의 전당(클레멘테는 현역 생활 중 해병대에서 6개월 복무했다)에도 헌액돼 있다. 메이저리그는 2002년, 9월15일을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날’로 선포했다. 푸에리토리코 정부 또한 클레멘테에게 ‘프로서’(국가적 영웅)라는 공식 칭호를 부여했다. 푸에르토리코 야구리그는 현재 ‘로베르토클레멘테리그’로 불린다.
클레멘테의 아내 베라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타이어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낯선 이를 그냥 지나치느니, 주지사와의 만남에 늦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클레멘테를 소개했다. 클레멘테는 1971년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상황을 개선할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졌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땅에서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2024시즌을 한창 준비하는 프로 선수를 비롯해 아마추어 선수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야구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그들에게 야구가 그저 돈벌이 수단만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