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의 금서기행, 나쁜 책] '통계 조작하고 포르노 만든 정부' 러시아 시민은 왜 이책을 훔쳤나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1. 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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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1984'

◆ 매경 포커스 ◆

AI 미드저니가 묘사한 조지 오웰의 초상화. Netha Hussain·Wikimedia Commons

학창 시절 자주 언급된 소설 '1984'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이미 고전이 된 '1984'가 다시 화제입니다.

'1984'가 러시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소설 '1984'는 왜 아직도 논란의 중심에 자리할까요. 오늘은 조지 오웰 장편

'1984'를 여행합니다.

왼쪽부터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당 지도자를 위해 한정판으로 제작한 '1984' 표지, 영국 펭귄북스가 2008년 출간한 '1984' 영문판과 한국어판.

집단 통계조작과 국책사업 '포르노'

가상의 미래를 그린 소설 '1984'에 담긴 작중 국제 정세부터 살펴볼까요. 소설 세계엔 오직 세 개의 강대국만 존재합니다.

러시아가 동·서유럽을 전부 흡수했고(유라시아), 미국은 북·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호주, 그리고 영국을 통합했으며(오세아니아), 중국은 동남아 국가와 한국, 일본, 대만 등을 10년간의 전쟁 끝에 점령했습니다(동아시아). 전쟁 중인 세 나라는, 그러나 사실 이념이란 게 별반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 국가입니다. '1984' 주인공 이름은 윈스턴 스미스입니다. 그는 오세아니아의 생계형 공무원입니다. 윈스턴은 미디어, 예술, 연예, 교육을 관장하는 '진리부'에 근무합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의 혼합 부처였지요. 그는 이곳에서 기록 변조를 담당합니다. 윈스턴의 주 업무인 기록 변조란 국가가 공표한 통계 수치를 사후에 '조작'하는 일이었지요.

정부가 발표한 생산계획은 매번 숫자가 틀렸습니다. 제대로 된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일반인은 정부 기록물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윈스턴은 통계 수치를 마음껏 조작할 수 있었지요. 원본은 이미 파기된 상태였습니다.

전체주의 국가를 묘사한 한 외국 작가의 그림. 소설 '1984'는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등 세 강대국으로 분열된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들 국가는 서로 전쟁 중이지만 사실 이념이 별로 다를 바 없고 내부 시스템도 엇비슷합니다. Eduardo Ruiz Mondragon·Wikimedia Commos

국민은 정부를 맹신하고 맹종합니다. 시민들은 혼재된 과거 기억과 확실한 현재 기록 사이에서 윈스턴이 저지른 조작을 신뢰하지요. 그 믿음의 결과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이 퍼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포르노는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성욕만큼은 절제가 안 되니, 정부가 아예 '싸구려 포르노물'을 직접 만든 겁니다. 채용된 포르노 제작자는 전부 여성이었고 남성은 제외되었습니다. 남성들이 보면 '오염'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찰싹 때리는 이야기들'과 같은 저급한 제목의 포르노가 밀봉되어 유통됐다고 책은 서술합니다.

이 나라에선 불법적인 쾌락도 장려되었습니다. 특히 불법 성매매였지요. 결혼의 목적은 사랑과 교감이 아니라 '당(黨)을 위해 헌신할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었으므로, 부부간 성교는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 아닌 정부 지침 사회활동의 일환이었습니다. 빈민가엔 '술 한 병'으로 치마를 내려줄 가난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정부는 불법 성매매를 단속하지 않습니다.

소설 '1984'의 계층화된 사회를 피라미드로 표현한 그래픽.

무서울 정도로 무지하고 무비판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윈스턴은 서서히 환멸감을 느낍니다. '이 나라가 근원적으로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윈스턴의 반골 기질을 알아챈 회사 상사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접근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정부로부터 사회악이자 병폐로 규정된 '지하 반군' 수장 골드스타인의 수하였는데, 그는 윈스턴에게 한 권의 책을 읽게 합니다.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정말로 실재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골드스타인의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두 이유

윈스턴은 골드스타인이 집필했다고 알려진 '그 책'의 첫 장을 펼칩니다.

골드스타인의 책에 따르면, 세 강대국은 전쟁으로 인해 얻는 경제적인 소득이나 실익도 없습니다. 이들 국가 내에서 생산과 소비는 하나로 묶여 있어서 새 시장을 개척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원자재는 자국 내에 풍부했고, 이미 소비 주체도 상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비(非)전쟁 상태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두고 골드스타인은 '잉여 생산물의 소진'과 '계층 사회의 유지'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조지 오웰은 주인공 윈스턴이 읽는 골드스타인의 문장을 통해 ①평등을 정의로 내세우는 자에게 권력을 쥐여줘도 세상의 불평등 구조는 왜 사멸하지 않는지를 고찰하고, 이어서 ②인류는 왜 항상 계층화와 강력하게 결합하여 다수의 노예를 낳는지를 함께 사유합니다.

소설 '1984'에 묘사된 세 강대국의 모습. 북남미 아메리카 대륙과 영국·호주가 통합된 오세아니아, 동유럽 전체를 러시아가 흡수한 유라시아,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 국가·한국·일본·대만이 모두 합쳐진 동아시아만이 존재합니다. 책에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은 따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Wikimedia Commos

"오늘날의 전쟁은 '전쟁'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것(세 열강의 전시 상태)은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뿔이 이상한 각도로 뻗어 있는 반추동물과 비슷한 모양새다. 이러한 상황이 무의미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잉여 소비재를 소진시킬 뿐만 아니라 계층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정서를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이제 전쟁은 철저한 내국적인 상황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전쟁이 영구히 지속되면서 이제 전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절하지 않나 싶다."(269~270쪽)

전쟁이 항구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잉여 생산물의 소진 때문이라면, 잉여 생산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닐까요. 생산부터 억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골드스타인이 간파한 정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생산을 억제하면 경제 불황으로 이어지고 불황은 일자리를 감소시키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국가 보조금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면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정권이 무너진다고 골드스타인은 봤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을 현재 상태로 유지하면서 잉여 생산물을 시민에게 분배하면 해결될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골드스타인이 파악한 사회주의 정부의 속내는 또 달랐습니다.

인간은 풍족함을 느끼면 사유의 진화를 경험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문맹에서 해방되고 이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확보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일당독재 체제의 허구성을 간파하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정부 지도자들이 실은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면서 자신들을 통치하고 있다'는 진실에 가닿는다는 겁니다. 그게 정부의 본성(本性)이라고 골드스타인은 기술합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정부엔 이런 결론이 타당해집니다.

"잉여 생산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도록 시민 전체의 노동력을 동원하되 분배는 하지 않음으로써 전(全) 사회의 궁핍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킨다."

그걸 가장 손쉽고도 간명하게 진행시키는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골드스타인은 책에서 '권력의 본질'도 사유합니다. 인류사에서 권력의 구도는 늘 같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최고위 계층(제1그룹)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중간 계층(제2그룹)은 최고위 계층으로의 진입을 희망했으며, 굶주리고 헐벗은 하위 계층(제3그룹)은 아예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는 전복적 사회를 꿈꿨으니까요.

제2그룹은 언제나 제3그룹을 앞세우면서 혁명과 전복을 꿈꿨다고 골드스타인은 씁니다.

"과거에는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평등이라는 명분 아래 혁명들이 자행되었다. 이들은 옛 독재를 몰아내자마자 또다시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목표는 포기되었다."(274~275쪽)

제2그룹은 제3그룹의 평등과 자유를 명분 삼아 기존의 제1그룹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제1그룹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바뀌면 사회 전복의 명분으로 사용된 제3그룹은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제2그룹에서 낙오된 사람들과 제1그룹의 잔당이 합세해 '새로운 세상의 제2그룹'을 형성합니다. 그 결과, 사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골드스타인의 글을 통해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인간들 간의 간격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273쪽)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

전체주의 국가를 비판한 소설 '1984'가 1949년 출간된 뒤 1988년까지 소련(소비에트연방)에서 금서였다는 얘긴 너무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최근 다시 또 화제가 됐습니다. 러시아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유명 서점에서 2022년 종합 베스트셀러 2위, 전자책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2023년엔 더 웃지 못할 뉴스가 보도됐는데, 2023년 러시아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이 바로 '1984'였다고 합니다.

2022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해로, '1984' 내용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는 게 서구 외신의 분석입니다. 전쟁의 무의미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음하는 대중(강제 동원된 병력)이 이미 '1984'에 예견돼 있으니까요.

독재국가 벨라루스는 2022년 '1984'를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벨라루스 주간지 나샤 니바에 따르면, 벨라루스 정부는 '조지 오웰의 책 판매를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1984' 등 오웰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대표는 안드레이 야누시케비치로 그는 구금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84'는 러시아에선 정작 금서가 아닙니다. '1984' 출간과 독서가 권장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소설 '1984'가 러시아 등 동유럽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구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인공 윈스턴의 국적이 오세아니아이고, 오세아니아는 미국과 영국의 서구문명 복합체라는 논리이지요. 하지만 조지 오웰이 생각한 오세아니아가 미국이나 영국을 닮았는지, 옛소련과 러시아를 닮았는지의 답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요.

"비정치적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소설 '1984'가 그려낸 1984년으로부터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출몰에 대한 1940년대 시민들의 불안감을 움켜쥐면서도 2020년대 현대사회의 불안감까지 동시에 증거하기 때문이겠지요.

오웰의 도정은, 비극적인 세계를 직접 온몸으로 걸으면서 감춰진 진실을 파악하고 인간이 비극을 견딜 수 있는 돌파구를 발견하려는 한 인류의 걸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격변의 시대는 오웰 자신의 소설적 독무대였던 셈이지요. 우리가 조지 오웰에게 감화되고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저 '현장성'에 있을 겁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은 바로 위기의 징후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진실한 종(鐘)인 것이지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초저음 주파수처럼 말입니다.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오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시리즈 끝>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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