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 성폭행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지인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일벌백계해야”
“나 요즘 많이 걸어.” 30대 여성 공보람씨(가명)는 부친이 병세에 시달린 이후 서울 관악구의 한 등산로를 자주 찾았다. 느티나무와 자작나무, 연못이 있는 생태공원 풍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이 등산로는 출근길이자 운동도 하는 공씨의 ‘일상적 공간’이었다.
등산로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성폭행하고 무차별 폭행해 숨지게 한 최윤종(31)의 선고기일을 하루 앞둔 21일 서울 금천구 금천구지체장애인쉼터에서 피해자 오빠인 공재현씨(37)와 지인 5명을 만났다. 이들은 “같은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며 최윤종과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다.
뇌사 상태·온 몸에는 긁힌 자국···“책임감 강했던 동생”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8월17일, 오빠인 공씨는 스마트폰으로 관악 등산로 성폭행 사건 기사를 읽었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다니” 하며 안타까워했지만 자신의 동생이 피해자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일 저녁, 경찰은 동생의 소식을 알렸다. 모친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이튿날 오전 1시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뇌사 상태였고, 온 몸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다리 한쪽은 부러져 있었다.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한 채 동생은 8월19일 사망했다.
공씨는 사건 2주 전 동생과 함께 한 마지막 날을 회상했다.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부산에 내려온 동생이랑 엄마랑 셋이 외식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대화를 나눴죠. 복싱을 배우던 동생은 ‘여자는 물리적 힘이 약하니 눈을 찌르라’고 관장님이 가르쳐줬대요. 공소장 읽어보니 동생이 실제로 눈을 찔렀다 나왔더라고요. ‘살기 위해 모든 걸 다 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2년 부친이 타계하기 전 부산 호스피스병원으로 내려와 한달 내내 병간호를 하던 동생, 10년 넘도록 혼자 서울살이를 하면서 집에 손 한번 벌리지 않은 동생, 몸에 좋다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어머니한테 주던 동생. 공씨가 기억하는 보람씨의 모습이다.
고인과 15년간 알고 지낸 친구 김모씨(35)는 “친구들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보람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분위기가 달랐다”고 했다. 다른 친구 김모씨(35)는 “어느 날 매일 떠들던 단톡방에서 보람이가 한마디도 안했고, 전화를 안 받았다. 가족과 연락이 닿고 나서야 뇌사 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며 “병원에 있을 때까진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고 했다.
범행 후에도 ‘피해자 탓’ 돌린 최윤종
6년간 고인과 축구 동호회 활동을 한 현혜경씨(50)는 네 차례 열린 모든 공판을 방청했다. 피고인석에 앉은 최윤종의 태도는 시종일관 같았다고 한다. 상반신을 의자 뒤로 기댄 채 깍지 낀 양손을 머리 뒤에 받치거나, 다리를 떨었다. 현씨는 “최윤종은 ‘원래 성폭행만 하려 했다’고 내내 주장했다”며 “성폭행이 가벼운 죄인 것처럼 말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성폭행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범죄이고, 중죄”라고 했다.
최윤종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주장도 했다. 지난해 9월 첫 공판 때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냐는 재판부 질문에 “살해할 생각은 없었고 피해자가 저항을 심하게 해 기절만 시키려 했다”고 답한 것이다.
최윤종은 지금까지 유가족에게 단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공씨는 “반성문을 딱 한번 썼다. 국선변호인이 ‘강간살인죄는 무기징역이나 사형 둘 중 하나’라고 하니까 ‘그러면 억울할 것 같다’며 겨우 쓴 거”라며 “반성문에도 ‘저는 아무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는데 왜 이런 범죄자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고 했다.
피고인 측은 최윤종이 학교폭력, 가정폭력 등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재판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만 아니라 어떤 폭력을 겪었어도 그 관계에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라며 “감형 사유로 인정돼선 안 된다”고 했다.
이 사건을 다룬 기사 댓글창에는 유가족과 고인을 향한 모독성 댓글이 달렸다. 공씨는 최윤종을 추켜세우거나 ‘이래서 성매매가 합법화돼야 한다’는 댓글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공씨는 “댓글을 달기 전에 ‘자기 가족이 그런 일 당하면 어떨까’ 생각해주셨으면 한다”면서 “성폭행 관련 기사의 댓글창은 닫거나 실명제로 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났을 일”
고인의 유가족과 지인들은 이번 사건이 ‘운이 나빠서’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났을 일’이라는 점을 시민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공씨는 “최근 뉴스를 유심히 보게됐는데, 이런 일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면서 “성범죄부터 시작해서 전 여자친구와 부모까지 찾아 살해한 스토킹 범죄도 계속 생기고 있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간 성범죄 처벌 수위가 낮았고, 이것이 ‘어느정도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겠지’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한 것 같다. 가해자 처벌수위를 올리길 재판부에 부탁드린다”고 했다.
현씨는 “이 시간에도 성범죄 피해자가 있을지 모른다”며 “최윤종이 언젠가 밖으로 나오면 또 범죄를 저지르고,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소장은 “왜곡된 성 인식을 갖게 되고, 범행 대상을 정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제동을 걸지 못한 모든 사람과 사회 시스템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고인의 공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탄원서에 서명한 시민들은 이 사건이 ‘직장에 출근하는 길’이라는, 평범한 삶 속에서 이뤄진 일이란 게 삭제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라며 인사혁신처의 재해 인정을 촉구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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