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일간의 금주탐험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축제의 밤들, 커다란 소리와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관중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세상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그런 적막함을 달래려 동료들과 시끌벅적 뒤풀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과유불급이 문제다. 뒤풀이를 적당히 했으면 귀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 밤에 취해, 술에 취해 나는 자꾸 술의 세계로 끌려간다. 건전하고 즐거운 음주생활을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작년 추석 연휴가 지나고 낙엽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던 가을녘부터 첫눈이 내릴 때까지 70일 동안 술을 끊었다. 평생 술을 안 마실 건 아니지만, 음주 습관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지 테스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파도를 타는 서퍼들처럼 술의 파도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에 삼켜진다.
예전에 위스키 제조 장인들 인터뷰에서 테이스팅 하느라 술을 매일 마시지만 1년에 한 달 정도는 금주한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자신들이 알코올 중독인지 아닌지 테스트를 해본다는 것이었는데, 속으로 “와! 저게 돼?” 했다가, “응, 왜 안돼?”라고 생각했다. 나라고 안될 게 있어? 하고 금주를 시작한 것이다.
술에는 중력이 있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기까지 무척 힘이 들듯이, 술의 중력을 벗어나기도 만만치 않다. 술의 강력한 중력을 떨쳐내기까지 딱 이틀 정도가 필요하다. 그 우울한 기분과 각종 유혹의 터널을 이틀만 견뎌내면 된다. 일단 궤도에 올라 중력에서 벗어나면 생각보다 평온하게 금주 궤도를 유지할 수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술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나와, 금주를 결심한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금주 기간 좋았던 점 몇 가지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첫째로, 얼굴빛이 환해진다. 술을 안 마신 지 2주쯤 지났을까? “요즘 얼굴 좋아졌네?”라는 말을 계속 듣기 시작했다. 이 말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같이 먹게 되는 안주나 야식들을 안 먹으니 부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열이 안 오르니 멍게 같던 피부가 좀 깨끗해졌다. 세수하다가 거울 봤을 때, “어, 이거 봐라. 나 좀 괜찮네?” 싶을 정도였다.
둘째, 시간이 많아진다. 술을 한번 마시면 7, 8시간 정도 걸린다. 운동이나 공부나 연습을 7, 8시간 하려면 절대 못 할 텐데, 어떻게 이런 집중도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내일의 에너지를 당겨 쓰는 것 같다.
그런데, 금주를 하면 그냥 시간이 아니라 맑은 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외로움을 엄청 잘 느끼는 편이라 술도 좋아하지만 사람들을 찾아 술자리를 찾아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일이 끝난 후 집에서 조용히 혼자 보내는 시간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안 읽은 책들도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반신욕하고 제철과일도 먹고 향초도 피우고 커피도 내려마시고, 옷장 정리며 가구 배치 바꾸기 등 집안일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하곤 했다. 금주하면서 시간도 많아지고 사색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미각, 후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이 좋아졌다. 슬프게도, 시각은 나이 먹어서 그런지 좀 침침해졌다. 금주 기간 결혼식에 참석해서 맛있는 고급 요리를 먹어봤는데, 이름은 잘 모르지만 오묘하고 섬세한 맛이 입안에서 확 퍼지는 걸 느꼈다. 아니, 셰프가 무슨 연금술을 썼길래 이렇게 입안에서 꽃이 피는 것일까? 좀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미각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연주할 때 느끼는 손가락 터치가 섬세하게 느껴졌다. 다른 악기들의 톤과 뉘앙스도 잘 들렸다.
돈이 절약되는 것도 좋은 점이다. 동네 친구들과 3차, 4차까지 마시면서 술집 투어를 돌기도 하고, 기분파이기 때문에 술을 잘 사는 편이기도 하다. 다음날 핸드폰 메시지를 보고 ‘이런이런 한경록, 또 허세를 부렸고만…’ 하게 된다. 물론 친구들과의 술값이 전혀 아깝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번에는 70일 동안 절약한 술값으로 음악 작업용 컴퓨터를 구매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많아진 것이다.
70일 동안의 금주. 오랜만에 등산을 한 기분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와 맑고 신선한 공기를 듬뿍 마시는 느낌,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면서 괴로워하기보다는, 좋은 감각들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슬기로운 금주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멈출 것인가, 멈춰질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하루하루가 축복이다. 우린 뭐든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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